포괄적 차별금지법: 표리부동 가짜 포스트모던 윤리
기독교 관점에서, 철학적-윤리적 사고의 깊이 결여돼
사상적 근본 없는 왜곡된 통치수단만 늘어날 가능성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국가인권위 최영애 위원장
▲포괄적 차별금지법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면담중인 국가인권위원회와 복음주의 기독교 대표자들. ⓒ크투 DB
◈차이와 차별: 한국의 표리부동한 포스트모더니즘

지난 목요일(6월 11일)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사무실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 대표들(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등)과 한교총 대표단(김태영 예장 통합 총회장, 류정호 기성 직전 총회장, 소강석 예장 합동 부총회장 등)이 만나, 현재 재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된 논의를 나누었다.

이날 면담의 주된 쟁점은 그동안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 줄곧 소명해온 대로, LGBTQ라 불리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급진적이고 과도한 법적 보호 시도가 기독교 신앙인들에 대한 역차별을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해당 쟁점의 세부적이고 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목회자들과 전문가들이 논의를 수행해 왔으므로 이를 여기서 재차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 논평에서는 본 사안을 바라보는 시야를 좀 더 확장해서 차이와 차별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 그리고 이런 인식을 주도하는 문화적 분위기와 정황에 대해 주로 살펴보려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문화적 정황을 살펴보려면, 먼저 한국 사회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초 차별금지법이 옹호하는 개별화된 인권 보장 사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한 인문학 강연회에서 초청강사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다.

“한국 사회가 점점 더 가면 갈수록 포스트모던적인 삶의 태도가 주류를 이뤄간다고 들은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진술에 대해 절반쯤 수긍하는 편이다. 한국의 문화 영역 일부는 분명 서구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아 왔고, 또 그 구체적인 흐름을 많이 따라간 상태임이 분명하다.

이런 조류에 가속도를 붙여준 일등공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한발 앞섰던 서구에서 그러했듯이, 통신 및 미디어 기술의 발전이다.

문화 민주주의와 문화적 국제화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 온라인-모바일 미디어 문화는 적어도 문화예술 측면에서 한국인들의 사고를 보다 개방적으로 만들어 주었고, 문화 권력 또한 상당 부분 대중에게 분산시켜 주었다.

정보통신 인프라라는 하드웨어적 측면의 지원을 힘입어, 문화예술 조류라는 소프트웨어적 측면이 매우 빠르게 포스트모더니티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품이 많이 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시아와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내부적으로 문화예술의 빠른 다원화와 국제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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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예술계의 빠른 포스트모던화는 정보통신-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크게 힘입고 있다. ⓒ크투 DB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유교적 집단주의 문화를 신봉해온 한국의 사회질서와는 상극에 가까운 사상이다.

애초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에서 처음 사상적으로 개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사상적 근거로 삼는 개인주의 문화를 영위해 왔기 때문이다.

개별 인간의 실존적 고유성에 대한 보존과 존중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사회를 1천년 넘게 지배해온 집단주의 문화와는 전혀 상성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한국, 일본, 대만이 부분적으로나마 포스트모더니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짧게나마 미국을 통해 서구의 문화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사회문화적 정황을 보면, 동아시아 집단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집단주의적인 사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유입되다 보니, 항상 첨단을 지향하는 정보통신기술 분야, 그리고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이 새로운 사상적-문화적 조류가 즉각적으로 수용됐다.

하지만 사회의 근본 질서를 구성하는 가족윤리, 생활윤리, 정치윤리 측면에서는 실질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유입이 거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개별화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개인보다 집단의 논리를 우선시하고 집단적 동일성에서의 이탈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표리부동한 가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차이와 통치: 집단화를 추구하는 관치 포스트모던 윤리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집단주의 사고에 물든 구시대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된 포스트모던 윤리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까?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는 당연히 이 법안의 세부적 내용도 우려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 속에 철학적-윤리적 사고의 깊이가 결여된 점 또한 걱정스럽다.

작금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추진 시도가 실은 인권 선진국이라 하는 일부 서구 국가들이 시행하니, 그저 모양새만 따라하고서 인권 신장의 치적을 내세우는 데만 급급한 조치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 근본사상과 동기를 잘 알지도 못하고 마음 속 깊이 납득도 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기득권자들이 차별금지 윤리를 주장하니 이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 한국의 정치와 사회질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세대, 소위 한국의 ‘꼰대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586 세대가 과연 진정으로 개별화와 일반 시민의 인권 보호에 사명감을 갖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반문해 본다면, 한국사람 대다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차별금지법
▲사회 곳곳에서 꼰대 문화와 갑질을 주도하고 있는 현 한국 기득권층, 이른바 586세대가 추진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심이 담겨 있을까?
원래의 포스트모던 윤리는 어떠한 기득권의 존재도 인정치 않는다. 진정으로 다원주의적 차별금지 윤리가 실현되려면 가장 먼저 타깃이 되어야 할 이들이 바로 이 기득권 세대 구성원들이다.

기득권자들이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특권과 우월적 지위를 내려놓는 데서부터 진정한 차별금지 윤리가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바라는 기득권 구성원은 단 하나도 없다. 이는 단순히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정치적 진영구분을 떠나 현 한국 기득권 전체에게 적용되는 사안일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본의 자체는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법제화되면 기득권층의 특권은 손도 대지 못한 채, 다수의 일반 시민, 대중의 권리를 서로 쪼개어 박탈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될 공산이 크다.

애초에 포스트모던 윤리를 관치적 방편으로 정립한다는 것 자체가 반포스트모던적 발상이다. 이는 정치철학적 사고의 깊이가 없는 현 기득권층, 집권층의 무지와 교만의 소치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현재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추진 시도의 본의는 오히려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관점에서, 그것도 이런 입장을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통치의 주도권을 붙들고 있는 이들은 단 하나라도 대중을 통제할 수단이 늘어나면 좋다. 기존에 법적으로 죄가 되지 않던 것도 범법행위로 규정되면 집권층에 대한 일반의 두려움이 증대되고, 이는 정치권력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복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개별화를 강화하려는 정책이 아니라, 역으로 집단화를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차별금지법 찬성
▲이상은 창대하지만 그 실상은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진정으로 우리 사회에 포스트모던 윤리의 정착을 도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참여연대
명목상 개인 인권 신장에 헌신한다고 하는 진보정치 계열 정당의 국회 의석 수가 과반을 훨씬 넘어선 현 상황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복음주의 기독교 대표 인사들을 면담한 것도 실은 잡음없는 법제화를 추진하려는 면피용 조치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해서 면담에 참석한 목회자들의 노력이 순전히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공청회나 면담 같은 것이 실은 명분 쌓기에 불과한 조치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신앙에서 비롯된 기독교계의 우려와 요청을 제기하고, 또 이를 신자들과 대중에게 알리는 일이 필요하기에 기독교계 대표자들이 나선 것이다.

면밀하게 따져보면, 현재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도 심각한 흠결이 있지만, 그 근본사상인 포스트모던 윤리 측면으로 봐서도 표리부동하고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구원을 갈망하는 평등한 존재자라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현 한국의 비기독교적이고 반인권적인 사회질서와 전통 속에서 이 원칙을 법제화하려는 시도는 사상적 근본이 없는 왜곡된 통치수단만 하나 더 늘릴 가능성이 높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