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김연경 역 | 민음사 | 전 2권 | 각 권 10,000원

프로이트, 과거의 상처 집중하게 해
아들러, 과거에 갇혀 있지 말라고 해
시대 따라 심리학도? 삶은 이론 아냐
모든 삶 이론적 설명하는 것, 폭력적
욥의 세 친구, 인과응보론으로 판단

삶은 이론이 아니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삶의 문제를 어릴 적 상실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도나도 생각하지 않던 과거의 상처를 뒤집어 본다. 사람들이 과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주목받게 된 아들러 심리학. 아들러는 ‘인간은 과거의 열등감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과거의 아픔에 갇혀 있지 말라는 말이다.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심리학이 달라진다. 사람이 변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대에 따라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이론으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니 프로이트에게 집중할 때도 있고, 아들러에게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삶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으로 삶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교육학 박사도 사춘기 자녀와 대화하기는 어렵고, 부부 상담 전문가도 자기 배우자 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교육이론과 상담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이론으로 삶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삶을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욕심내면 그 이론은 폭력이 된다. 욥의 세 친구들 모습이 그렇다. 그들의 이론은 ‘인과응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인과응보 이론으로 욥을 도와주려고 한다. ‘너에게 고난이 찾아 온 것을 보니, 너에게 죄가 있구나. 회개하라!’ 인과응보의 이론으로 보면 완벽한 조언이다. 회개만 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질 것 같다.

친구들의 말은 욥에게 답이 되지 않는다. 욥의 마음을 답답하게 할 뿐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해결이 아니라 슬픔이다. 이론으로 삶을 평가하니 도와주려고 한 말도 폭력이 된다. 삶은 이론이 아니다.

<죄와 벌> 주인공, 이론 붙잡힌 삶
사회에 해악 끼친다며 살인 정당화
이후 죄 숨기려 할수록 날카로워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이론에 붙잡힌 사람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 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23세의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다. 그는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다 경제적 이유로 휴학을 한 상태다. 소설은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과정과 살인 이후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스콜니코프(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가 생각하기에 전당포 노파(알료나 이바노브나)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돈만 밝히는 고리대금업자에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사는 동생(리자베타)에게 조차 인색하고 악독했다.

주인공은 그녀처럼 악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돈으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사회에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벌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이런 생각은 단순히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깊은 생각과 성찰의 결과로 나온 이론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전쟁과 투쟁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지만,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리와 책임조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이런 내용을 암시하는 논문도 발표한다.

무엇보다 자기 이론을 실천하려고 계획한다. 어떻게 살해도구를 준비하고, 어떻게 살인을 실천할 것인지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리고 노파가 혼자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시간. 도끼를 외투 속에 숨긴 채 찾아간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도끼로 노파를 죽인다.

사건은 그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노파를 죽인 그 순간 노파의 이복 동생 리자베타가 집으로 들어오게 되고 범죄를 숨기기 위해 ‘착한’ 리자베타까지 죽인다.

이 후 소설은 그가 얼마나 죄책감을 겪고 있는지 보여준다. 죄를 숨기려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는 신경. 몸도 점점 쇠약해지고 심지어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본인은 이 모든 현상을 죄책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범죄가 발각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자수를 권하는 소냐(소피아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그저 이(蝨)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蝨)를.”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의 살인은 죄가 아니라 영웅적 행동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죄책감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본인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살인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었다. 소설의 대부분은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제목대로 그의 행동은 ‘죄’였고, 그가 받는 고통은 ‘벌’이었다.

소냐, 가족 위해 매춘부가 된 소녀
순결이란 이론 대신, 가족 위한 삶
하나님 섭리 기다리며, 삶 붙들어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소냐(소피아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다. 살인을 계획 중이던 라스콜니코프는 알콜중독자인 소냐의 아버지(세묜 자하로비치 마르멜라도프)에게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소냐는 황색 감찰을 가지고 산다. 황색 감찰이란 매춘부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신분증 겸 영업 허가증이다. 원래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소냐는 억울하게 해고를 당한 후 일을 구하지 못했다. 집에는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폐병에 시달리는 계모. 계모가 데려온 어린 동생 세 명이 있다.

다른 매춘부가 소냐에게 매춘 일을 제안한 날. 그녀는 계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정말로 제가 그런 일을 하러 가야 할까요?”

그때 계모의 대답. “뭘 그리 애지중지하니? 그게 무슨 보물이라고!”

그 말을 들은 소냐는 오후 5시가 넘어 숄을 두르고 코트를 입고는 집을 나섰다. 8시가 넘어 다시 돌아온 소냐. 그녀는 식탁 위에 30루블의 은화를 올려놓고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숄을 얼굴과 머리에 뒤집어 쓴 채, 벽을 보고 누워서 어깨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본 계모는 소냐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발에 입을 맞추고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일어나 여전히 떨고 있는 소냐를 꼭 안은 채 함께 잠이 들었다.

아담 하와 타락 원죄
▲아담과 하와의 ‘원죄’. ⓒpixabay.com
가족을 위해 매춘부가 된 소냐. 그녀에게 ‘순결(純潔)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이론이고, 이복동생들을 먹일 ‘빵 한 조각’은 삶이었다. 그녀는 이론을 따라 살지 않았다. 가족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채웠다.

가끔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찾아와 용돈을 요구할 때면, 그녀는 자기에게 남겨진 몇 푼의 돈마저 싹 긁어서 주었다.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며, 가족을 사랑하고, 삶을 붙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찾아와 살인죄를 고백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그를 위해 울어주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자기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어요! 지금 온 세상을 통틀어 당신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라스콜니코프를 안고, 목 놓아 울었다.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니코프. 그는 쓸모없는(?) 노파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죽어가는 것은 자신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려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위해 소냐가 울었다. 이론에 메여 통곡하는 법도 잊어버린, 울지 않는 그를 위해 소냐가 대신 울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죄책감을 부인했지만, 소냐는 그가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일어나! 지금! 지금 당장 나가서 교차로에 서서, 우선 당신이 더럽힌 저 땅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춘 다음 온 세상을,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해.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시 생명을 보내 주실거야.”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깨닫기 원했다. ‘살인’은 이론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 원했다. 그래야 죄책감이라는 ‘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더 이상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주인공은 소냐의 말을 따라 자수를 선택한다. 경찰서로 가는 길. 그 길에는 광장이 있다. 그때 소냐의 말이 생각난 주인공은 광장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까지 몸을 숙여 절을 하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소냐의 말 따라 자수한 라스콜니코프
주인공 회복시킨 것, 이론 아닌 사랑
이론 맞춰 살다 결국 사람 놓치게 돼

경찰서에 도착한 라스콜니코프. 그는 ‘자묘토프’라는 경찰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계획이었다. 공교롭게도 ‘자묘토프’ 그때 자리를 비웠다. 잠시 갈등하던 주인공은 자수하지 못하고 경찰서 마당으로 나와 버린다.

그곳에는 창백하다 못해 사색이 된 소냐가 서 있었으며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소냐를 바라보던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몸을 돌려 경찰서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찰 앞에 서서 또박 또박 말했다.

“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진술을 되풀이했다.

삶은 이론에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이론에만 맞추어 살려고 하면 결국 사람을 놓치게 된다. 라스콜니코프를 회복시킨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안식일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 위한 하나님 배려와 사랑으로
전통과 신학, 잘못 하면 폭력 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예수님은 안식일을 ‘동작 그만!’이라는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니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 사랑을 실천하신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이론이다. 결코 움직이면 안 된다. 치료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전통에 사랑이 묶여 버렸다. 신학이 이론이 되니 사람을 살리는 법이 오히려 폭력이 된다. 행복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삶을 옭아매는 쇠사슬이 된다.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계산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요한복음 3장 16절’, 사람을 위해 아들을 버리신 바보 하나님. 경제학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효율성은 빵점이지만 효과는 100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죄 사함의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신학, 삶 지탱해주는 뼈대가 돼야지
사랑 통제하는 깁스가 돼선 안 된다
하나님, 매주 우리에게 사랑을 낭비

삶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으로 따지고 계산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오히려 냉정하고 잔인해질 뿐이다.

기독교 신학 역시 이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삶을 지탱해주는 뼈대가 되어야지, 사랑을 통제하는 깁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보다 사랑이다. 이론보다 삶이다.

주일 오전이면 은혜 받고 저녁이면 다 흘려버리는 내 모습. 하나님은 매주 우리에게 사랑을 낭비하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 내 영혼이 다시 일어서려면 하나님 사랑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결코 이론이 아니다. 성도도 이론과 계산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사랑할 이유는 언제나 충분하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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