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공산주의 체제보다, 민주주의가 뛰어남 보여줘
중공군 우리 위협했지만, 우리는 중국 민주화 기여해야

크리스찬 리더십 컨퍼런스 박명수
▲박명수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크투 DB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박사) 제90회 정기세미나 및 6.25 전쟁 70주년 기념 대토론회가 ‘거시적으로 본 6.25 전쟁과 한국 사회’를 주제로 9일 오후 부평 카리스호텔 소성룸에서 개최됐다.

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소장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는 “6.25가 동족상잔의 전쟁이자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일반적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좀 더 포괄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분명 6.25는 한국 민족의 가장 큰 아픔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6.25를 딛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박명수 교수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6.25 전쟁을 통해 미소 양 진영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가 확립됐고, 세계는 공산권과 서방권으로 나뉘었다”며 “이런 국제적 변화는 한반도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다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를 네 가지 측면에서 정리했다. 먼저 세계사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는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됐고, 한국 정치 측면에서 남한 사람들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됐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세계적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했고, 한국교회사적 측면에서 새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교회가 사회의 새로운 동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변화에 앞서 국제질서 변화에 대해 박 교수는 “6.25 전쟁은 본질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소련과 이를 막으려는 미국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소련과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봤지만, 소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인접 국가들을 공산화시켰다. 이에 소련과 협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은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한반도가 분단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을 공산당에게 넘겨줬지만, 소련에서 분리해 독립적 공산국가를 만들기 원했다. 그래서 1950년 1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유화 제스처를 보냈지만, 소련은 이를 미국의 한국전 개입 반대로 이해해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했다”며 “6.25 전쟁은 갈등이 있던 서방 진영도 하나로 묶었다. 이제 세계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고, 과거 전체주의와의 투쟁 시대보다 더 길고 엄격한 국경 통제가 이뤄졌다”고 했다.

1. 6·25 전쟁과 대한민국의 서방 자유세계 편입

6.25 전쟁이 가져온 한국 사회의 변화 중 첫째는 ‘서방 자유세계 편입’이다. 그는 “6.25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휴전선의 설치였다. 그러나 휴전선은 단지 한반도만 둘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중요 문화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중국 중심의 중화 질서와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라며 “이는 다른 한편으로 남한 사회를 미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와 하나로 묶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미국에서 낯선 땅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선교사들뿐이었지만, 트루먼 독트린 이후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 다음, 한반도는 미국에게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 하는 전선이 됐다”며 “남한의 성공은 미국의 성공, 남한의 패배는 미국의 패배가 됐다. 여기서 미국이 한국 사회를 도와야 하는 당위가 형성됐고,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을 가져온 중요 원인이 됐다”고 했다.

일본에 대해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지만,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은 다같이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세계에 속해 공산주의를 막아야 하는 공동 목표를 갖게 됐다”며 “한국 정치는 여기서 대중적으로 반일 감정을 유지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국제적 공조를 하는 해결책을 찾았다. 한국은 상당한 반일 감정에도, 일본과의 정치·경제적 공조를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6.25가 만든 휴전선은 눈물의 분단선이었지만, 이 분단선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미국과 일본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오늘의 정치·경제 대국이 됐다”며 “휴전선은 민족 분단의 철조망이면서, 중화질서나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우리를 막아주는 울타리가 된 것이다. 이런 울타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2. 6·25 전쟁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체제 확립

둘째로 ‘민주공화국 체제 확립’에 대해선 “6.25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보다 실질적으로 두 체제를 비교할 기회를 줬다. 전쟁 직후 몇 달간 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경험했다”며 “머슴들이 주도한 소위 완장부대들의 행패는 인민재판과 인민위원회의 본질을 보여줬고, 일제시대보다 더 가혹한 세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버렸다. 사람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천국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박명수 교수는 “1950년 10월 이후에는 북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할 기회였다. 북한에 진주한 미국은 지금까지 북한이 선전하던 미국과 달랐다. 미국은 막강한 힘을 가졌고, 이들이 추구하던 민주주의는 인간의 인권을 존중했다”며 “그해 겨울 중공군 개입으로 미군이 철수할 때, 함께 따라간 사람이 백만 명 이상이었다. 이러한 월남 피란민의 출현은 어느 체제가 좋은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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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으로 본 6.25 전쟁과 한국 사회’를 주제로 개최된 제90회 정기세미나 및 6.25 전쟁 70주년 기념 대토론회.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박 교수는 “중공군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줬는데, 중공군과 인민군이 도착했을 때 서울은 정말 텅 비었다”며 “과거 공산주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망설이지 않고 분명히 결단한 것이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을 반공 국가로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국가 체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48년 대한민국이 출발했다면, 1950년 6.25 전쟁은 대한민국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3. 6·25 전쟁과 시장경제 체제 도입

셋째로 ‘시장경제 체제 도입’에 관해선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당시 강력하게 전개되던 공산주의와 부딪쳤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봤다”며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제도 못지 않게, 어떤 경제정책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막대한 일본 기업과 일본인 소유 토지, 한국인 지주의 토지 등에 대해, 북한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기업과 토지는 물론, 한국인이 갖고 있던 토지까지 국유화했다. 반면 남한 사회는 일본인 토지는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한국인 대지주 토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했다”며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다수 농민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이 됨과 동시에 당당한 토지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런 농민들에게 6.25 이후 공산당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겠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을 빼앗는 것과 다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가 남겨놓은 기업들의 경우 처음에는 국가가 소유했으나, 6.25 이후 미국은 한국에 원조하는 대신 기업 국유화 최소화와 사기업 전환 등의 경제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경제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여기에서 사기업이 탄생했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 통상을 죄악시하던 한국이 수출을 통해 살아가는 국가가 된 것으로, 이는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제도와 이를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든 미국·일본 등 자유무역 국가들의 존재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4. 6·25 전쟁과 한국 개신교의 리모델링

넷째로 ‘사회의 새로운 동력으로 등장한 한국교회’에 대해 “해방 직후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대안 세력으로 등장했다. 일본과 싸워 이긴 나라는 미국이고, 이들과 오랫동안 연결고리를 갖고 있던 한국의 유일한 집단이 바로 기독교였기 때문”이라며 “해방 직후 전국 13도에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중 7명이 기독교인이었고, 당시 가장 중요한 정치가들인 북한 조만식, 남한 이승만·김구·김규식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주한미군 잔류라고 여겼다. 당시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를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라고 표현했다. 당시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세력이었다”며 “6.25 발발 이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더욱 적대적 관계로 발전됐다. 북한 인민군은 남한에 와서도 기독교를 적대시했고, 철수하면서 남한 각지의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6.25는 한국 기독교의 재건과 공산주의를 막는 차원에서 미국 기독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기독교는 해방 후 한국에 어떻게 다시 들어올지 고민했는데, 전쟁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어려움을 겪으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재입국했다”며 “이들은 다시 신학교육 기관과 각종 기독교 단체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한국 기독교는 다시금 선교사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이야기했다.

또 “6.25는 선교사들에게 사회사업이라는 새로운 사역을 전개하게 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와 민간인들로부터 지원받은 재정과 물자로 한국인들을 도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월드비전”이라며 “6.25를 통해 한국 기독교는 당시 정부가 할 수 없던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 각종 사업을 주도했다. 당시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위해서 한 일은 ‘유사 정부’ 역할과 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남겨진 과제: 6·25 전쟁과 한반도의 통일

끝으로 6.25가 남긴 과제로 ‘한반도 통일’을 제시했다. 그는 “6.25 전쟁은 냉전 초기 국제정치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6·25를 통해 각각 자신의 진영을 공고화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단지 한반도 통일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상처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며 “6·25를 통한 한반도 내 두 체제의 확립은 어떤 체제가 더 나은지를 보여줬다. 그 평가는 ‘88 올림픽’을 통해 나타났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어떤 체제가 나은지 똑똑히 보게 됐고,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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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으로 본 6.25 전쟁과 한국 사회’를 주제로 개최된 제90회 정기세미나 및 6.25 전쟁 70주년 기념 대토론회 현장.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박명수 교수는 “2020년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1950년대보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역사는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을 무시한 공산주의 체제보다, 개인의 인권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제도임을 보여줬다. 물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것은 수정 보완할 것이지 폐기 대상은 아니다”고 결론내렸다.

박 교수는 “우리는 중국이 보다 개방되고, 민주화되길 바란다. 그래서 다시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행동이 사라지길 바란다”며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이다. 북한에도 시장이 형성되는 등 자본주의의 물결이 들어가고 있다지만,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개인 인권이 무시당하고 있는 나라”라고 우려했다.

그는 “북한 동포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남한은 무력으로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원하진 않지만, 6·25처럼 자의든 타의든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자유를 맛보고, 한반도 전체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이것이 6·25 전쟁이 자유 대한민국에게 부과한 과제”라고 제언했다.

이와 함께 두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먼저 ‘한반도는 언젠가 자유민주적 질서 위에 통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실패로 끝나고, 자유가 온 세계에 퍼지는 상황 가운데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민주적 질서에 기초한 통일이라는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이런 자유민주 질서가 확장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한반도는 아시아의 교차로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 희생양이 됐지만, 세계 10위권 국가가 된 지금 자유세계와 손을 잡고, 아시아 대륙 특히 중국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과거 중공군은 우리의 자유를 위협했지만, 이제 우리는 중국의 민주화에 기여해 아시아 대륙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날 세미나 사회는 부소장 박창훈 교수(서울신대)가 맡았으며, 토론에는 조의행 교수(서울신대), 김승욱 박사(중앙대 명예교수), 윤정란 교수(숭실대) 등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