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마귀적’이란 말처럼 곡해되고 오도되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마귀’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대개 질병, 범죄, 폭력, 음란, 마약중독, 알콜중독 같은 어둡고 칙칙한 개념들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마약은커녕 알콜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 시민들. 깔끔하고 예의바른 교양인들, 학식있고 지적인 사람들, 심지어 신학자, 설교자까지도 그의 지배력 아래 들 수 있다.

이는 마귀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공략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의 이런 전방위적(全方位的) 궤계를 분별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 대한 공략이 마귀가 목표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마귀의 궁극적 타깃은 하나님

마귀는 인간을 고통과 불행에 빠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귀의 궁극적 타깃(target)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도 궁극적으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기 위함이다.

그들을 타락시킴으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그의 소유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그러나 택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기에 그들의 모든 시도는 헛수고로 그칠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간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다면(고전 7:23, 계 5:9), 마귀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탈취’해 내는데 목적을 둔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귀의 궁극적 타깃이 인간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마귀가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것도(창 3:6), 마귀가 욥을 시험한 것도(욥 1:12) 그들을 파멸에 빠뜨리기 위함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주지하듯, 시험의 궁극적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타락시켜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공경을 받고 그들이 그의 통치 가운데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타락의 결과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됐다).

다음 이사야 선지자의 말은 ‘질투의 화신’다운 사단의 면모를 드러낸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마귀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도(요 8:44-59), 단지 ‘나사렛 사람 예수’를 핍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2위이신 성자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이고,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다.

마귀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극렬하게 방해한 것도 그것을 통해 이루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고, 나아가 ‘택자’를 하나님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그가 죄인을 구속하는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의 이런 집요한 방해에도 하나님은 기필코 당신의 뜻을 성취하신다.

◈율법 아래 있는 마귀

마귀의 세력은 무한정하지 않으며, 그의 위상 역시 궁극적이 않다. 이는 그가 피조물이라는 사실 외에도 그가 ‘율법에 종속된 존재’라는 점에서다.

사람들이 피조물 마귀를 궁극적 존재(ultimate existence)처럼 그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의 적수’로 등극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는 말씀을 ‘하나님 아들이 죽으신 목적이 마귀 사멸(死滅)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서, ‘마귀 정복’을 하나님 아들의 궁극적 목표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귀와의 거래’, 곧 ‘사단에게 바친 속전(贖錢)’이라고 가르치는 ‘사단 배상설(賠償說)’같은 것도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것의 원조는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마귀 속임설(deceiving the Devil)’의 주창자 오리겐(Origen)이다.

‘마귀의 종속성(dependency, 從屬性)’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율법이 폐해졌을 때, ‘마귀의 숙주(host, 宿主)’인 ‘사망’의 폐지와 이로 인한 ‘그의 무력화’를 통해 드러났다.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깨뜨렸다(창 3:15)’는 것은 ‘그리스도가 마귀를 주적으로 삼아 그를 박살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성취해 ‘마귀의 숙주’인 ‘사망’이 폐해지니 그 역시 종말을 맞게 됐다는 뜻이다. ‘마귀 박멸’은 ‘율법 폐지(성취)에 따른 부산물(副産物)’이지, ‘마귀’를 주적으로 삼아 무찌른 결과가 아니다.

비유컨대 구더기의 진원지인 분뇨와 거름더미를 없애니 자연스럽게 파리가 박멸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마귀’의 결투장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 박은 것은 ‘마귀’가 아니고 ‘율법’이다(엡 2:15). 율법이 최고위(最高位)의 수장(首將)이고 죄, 사망, 마귀는 그것의 수하에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집행관(an executor)일 뿐이다(고전 15:55, 히 2:14).

마귀가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을 저주와 불행에 빠뜨리는 것도 ‘율법(갈 3:10)’이지, ‘마귀’가 아니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그것을 수행할 뿐이다.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율법에서의 구원(갈 3:13)’이지, ‘마귀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사망’을 숙주로 삼는 기생물(a parasite, 寄生物)인 마귀가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1순위 대상일 수 없다.

‘마귀에서의 구원’은 ‘율법 구원’에 따른 ‘부가적인 구원’이다. 굳이 순위를 따진다면, ‘율법에서의 구원’ 다음에 ‘죄에서의 구원’이고, 그 다음이 ‘사망에서의 구원이고, 마지막이 ‘마귀에서의 구원’이다(고전 15:55. 히 2:14).

따라서 최상층(最上層)인 ‘율법에서의 구원’을 받으면 그 아래 죄, 사망, 마귀에게서도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죄, 사망, 마귀’에게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그것들 하나하나와 각개전투(各個戰鬪)를 하지 않으셨다.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최상층(最上層)인 율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므로 거기에 복속된 ‘하위(下位)의 것들’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원리에 따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목표도 ‘하위의 마귀에서의 해방’이 아닌 ‘최상층의 율법에서의 해방’에 두며, 그것의 유일한 방편인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에 둔다.

오늘 은사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서 ‘귀신 쫓는 일’은 힘쓰면서도 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복음 전도에는 그리 힘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율법에서 해방되어 ‘마귀의 숙주(host, 宿主)’인 ‘사망’이 떠나가면 마귀는 자연히 떠나간다.

다시 말하지만 ‘마귀의 지배’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일시적 축사(逐邪)를 통해서가 아닌, ‘마귀의 숙주’인 ‘사망’을 근원적으로 없애는 ‘율법 해방’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된다.

마귀가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 당연함은, 죄인이 예수를 믿어 율법에서 해방되면 마귀의 숙주(host, 宿主)인 ‘죄와 사망’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 더 이상 그를 장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산이 마귀적

아담의 후손 ‘자연인(the natural man)’이 ‘마귀적’임은 그들이 전가받은 원죄로, 날 때부터 죽은 채로 태어나 ‘사망의 권세자’ 마귀(히 2:14)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의 족보 ‘아담 계보(고전 15:22)’에 속한 자연인에게는 마귀가 깃들어 있다.

거듭나지 못한 ‘미중생자’를 ‘마귀적’이라 함도 같은 맥락이다. ‘죄로 죽은 자연인’ 상태에 있는 그들을 ‘사망의 권세자’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마 24:28), 영적인 시체인 ‘자연인(the natural man)’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그를 장악한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말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사도 야고보가 ‘마귀와 자연적인(natural) 것’을 연관지우고 있음도 같은 원리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자연적(natural, unspiritual)’이요 ‘마귀적’이니(약3:15).”

‘자연적인(natural) 것’은 ‘죽음’의 지배아래 있기에 ‘사망의 권세자’ 마귀가 그를 상관하는 것이다. 먹거리인 생선이나 채소는 ‘자연산’이 좋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중생하지 못한 자연산(아담산)’은 마귀적이다.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을 다닌다(마 12:43)’고 한 것도 이같은 마귀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귀신이 좋아하는 ‘물 없는 곳’은 ‘미중생하여 성령이 없는 자’, 곧 ‘마귀의 숙주’인 ‘사망’이 머물러 있는 자들이다. 마귀는 그들을 그의 거처지로 삼는다.

반면 성령으로 거듭나 ‘마귀의 숙주’인 ‘사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마귀가 거할 처소가 없다. 따라서 마귀는 그들에게 머물 수도, 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