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후퍼. 청교도 신앙의 씨앗이 된 순교자.
▲존 후퍼. 청교도 신앙의 씨앗이 된 순교자.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갑작스러운 왕들의 사망에 따라서 정치와 맞물려 있었기에 엄청난 세속권력의 강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헨리 8세의 자녀들 시대, 에드워드 6세, 메리 여왕,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이어지면서 정치적인 대혼란이 연속되었다. 소수의 상류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을 고수하려 했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종교개혁을 열망했다. 여러 명의 최고 통치자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종교개혁의 방향도 폭풍을 몰고 왔다.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은 처절하고도 혹독한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통치 기간 동안 (1547년부터 1553년까지) “추밀원”(국왕의 통치에 관한 귀족대표 4인의 자문기관)이 통치를 맡아서 체계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뿌리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교회마다 칼빈주의 신학이 크게 증대되어서 영국교회는 모국어로 기도서를 갖게 되었다. 종교적인 의식순서를 폐지하고, 성직자들의 독신주의를 금지시켰으며,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를 하던 4천여 수도원을 징수했다. 교회를 물들이고 있던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성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파괴하기 어려운 동상들은 머리를 부쉈다. 예배당의 벽화들은 흰색으로 덧칠했고, 영어 성경 문구로 대체되었다. 유리창에 채색된 성경의 이야기들도 파괴하고, 투명한 유리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십자가상도 제거되었다.

1549년에 새로운 “공동기도문과 예식서”를 영어로 발표해서, 라틴어로 된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예배방식을 대체하도록 했다. 신부가 성도들을 등지고 제단을 향해서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인 죽음을 반복적으로 시행하던 방식을 폐지하고, 성도들을 마주 보면서 설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사를 완성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은 파쇄 됐다. 개신교회 목회자들은 자신들을 “성직자”(priest)가 아니라 “목회자”(minister) 혹은 “설교자”(preacher)라고 소개했는데, 이젠 더 이상 희생 제사를 집례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는 청교도 신앙의 씨를 뿌린 선구자이자, 순교자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시토회 수도원에서 수사로 지냈다. 1536년 헨리 8세가 수도원을 폐지함에 따라서, 후퍼는 토마스 애런덜 경의 집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후퍼는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들,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바울서신 주석들』을 읽고 난 후 복음적인 신앙으로 회심했다. 변화된 그의 견해들이 교구 안에서 문제가 되자, 1544년경에 유럽대륙으로 건너가서 피난처를 찾았다.

후퍼는 직접 불링거를 직접 만나기도 했고, 종교개혁에 심취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가 심한 질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할 때에, 극진히 돌보아 준 간호사 앤 드 채르클라스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결혼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후퍼는 개혁교회의 예배 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위스 개혁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목회자들은 제사 예복을 입지도 않았고, 설교는 성경에 의존했으며, 성찬은 이차적인 관심사항이었다. 한마디로 헨리 8세가 선포한 『6개 조항들』과는 전혀 달랐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에드워드 6세가 국왕에 등극한 1547년 1월 28일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집안에서 왕의 후견인이 되었는데 서머셋 공작이 종교개혁을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후퍼는 1549년 5월에, 아내 앤과 어린 딸을 대동하고 다시 영국에 돌아왔는데, 루터파가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죄의 사함을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을 금지시켰다.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도 종교개혁의 흐름을 멈추지 않으려 했다. 후퍼는 그를 도와서 영국교회를 통치하는 구조를 바꿨고, 한층 더 개혁된 내용으로 공동기도문의 개정판을 1552년에 출판했다. 미사를 비롯한 모든 로마 가톨릭의 성례제도가 폐지되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부가 집례하는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진짜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화채설”을 가르쳤는데, 이로 인해서 미신적이며 기적적인 사건이 벌어진다는 교리를 가르치면서 성직자의 지위를 한층 높였기 때문이다.

후퍼는 영국의 죄악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취리히에서 체험했던 것들에 비해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여러 분야에서 미진한 부분들이 많았음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지적했다. 첫째로, 목회자들은 아직도 로마 가톨릭의 신부 예복을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고, 아직도 여러 성당에서는 촛불들, 십자가들, 제단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둘째로, 평신도들은 주기도문을 하면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만 했는데, 전혀 성경적인 예배 방식이 아니기에 후퍼는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로마 교회의 관례들에 대해서 후퍼는 분노했는데, 바로 그가 주장했던 내용들은 훗날 청교도 신앙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1555년 2월 9일, 후퍼의 순교장면.
▲1555년 2월 9일, 후퍼의 순교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