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0년대, 종교개혁의 밝은 희망이 담긴 그림. 런던 국립박물관.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으로 에드워드 6세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는 헨리 8세. 그 우측에는 에드워드 세이무어 경과 주요 인물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들 머리 위로 벽에는 로마 가톨릭의 성상과 우상들을 부수는 모습이 보인다. 새 왕의 발 앞에는 목이 꺾어진 교황의 머리 위로 성경이 펼쳐져 있는데,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5)가 쓰여있다. 좌측 끝에는 혼비백산해서
▲1570년대, 종교개혁의 밝은 희망이 담긴 그림. 런던 국립박물관.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으로 에드워드 6세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는 헨리 8세. 그 우측에는 에드워드 세이무어 경과 주요 인물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들 머리 위로 벽에는 로마 가톨릭의 성상과 우상들을 부수는 모습이 보인다. 새 왕의 발 앞에는 목이 꺾어진 교황의 머리 위로 성경이 펼쳐져 있는데,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5)가 쓰여있다. 좌측 끝에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가는 수도사들과 신부들, 우측 하단부에는 귀족들이 당황한 모습이다.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청교도 운동은 영국이 로마 가톨릭의 낡은 체제로부터 벗어나던 독특한 정치상황 속에서 교회이 개혁운동으로 드러났다. 영국에서 출발하여 뉴잉글랜드로 이어진 청교도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첫 출현과 시련들, 1540년대-1603
2) 불굴의 신앙, 1603-1630.
3) 개혁의 꿈을 성취한 빛나는 업적들, 1630-1660.
4) 쇠퇴기, 1660-1689,
5) 뉴잉글랜드 건국의 조상들, 1630-1740.

처음 영국 땅에 청교도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540년대이다. 영국이 로마 가톨릭이라는 낡고 오래된 옷을 벗어버리려고 다양한 대안들을 모색하고 있을 때에, 교황주의 제도의 상징과도 같은 예복을 거부하는 신앙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시스터파 수도사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을 알게 되면서 그저 조상들이 해온 방식대로 따라가는 길이 나쁜 신앙을 답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에 속한 자라고 발견이 되면 계속해서 화형에 처하고 있었기에, 후퍼는 1547년에 스위스 취리히를 향해 떠나야만 했다. 그 해에 헨리 8세가 사망하였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국왕과 여러 왕비들, 여왕들이 관련된 정치적인 대사건들이었고, “폭풍의 연속”이었다. 청교도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거짓된 것들을 온 마음으로 미워하는 자”였다. 당시 타락하고 부패했던 로마 가톨릭과는 완전히 다르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순수한 경건을 실천하려는 열망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청교도는 성경와 양심에 위배되는 그 어떤 지시나 지침에 대해서 그저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청교도 신앙이 잉태된 저변에는 불의한 정치지도자 국왕과 그 주변에서 타협을 모색하던 탐욕주의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청교도 사상이 수 백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대륙의 역사적 사건들과 중요한 신학자들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갱신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엄청나게 바꿔버린 것이다. 변혁의 새바람이 각 지역에 확산되었는데, 영국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국왕의 탐욕을 부추기는데 악용되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봉건군주 체제 하에서 부조리한 신앙을 철저히 해부하면서 유럽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을 무렵에, 영국 땅에서는 탐욕스러운 국왕이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헨리 8세(1509-1547)는 1533년에 첫 아내 캐터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국왕을 교회의 최고 권위로 선언하는 “수장령” (Act of Supremacy)을 대담하게 발표하였다. 1536년에는 수도원을 해산시켰는데, 부패한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는 반성직주의가 팽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전혀 신앙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형의 아내였던 캐터린을 왕비로 맞이하여 20년 동안을 살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교황청에서 자신과 아내 사이의 이혼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충성스러운 스페인의 공주였던 왕비를 보호하기 위해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들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헨리 8세는 이미 궁녀 앤 볼린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후 두 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두 명의 왕비와 이혼했다. 헨리는 거의 대부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교리들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화채설을 신봉하고 고해성사를 시행하며 성직자의 독신주의와 미사를 중시했다. 더구나 말기에는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의 시종과 공신들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