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칼빈주의
겸손한 칼빈주의

제프 메더스 | 김태형 역 | 좋은씨앗 | 256쪽 | 14,000원

신학은 자신의 뛰어남과 예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함이 개인의 출세와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장사꾼에 불과할 것이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최홍석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중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은 “신학은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신학을 하는 것 같다.

칼빈주의자들은 한 사람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반으로 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추구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칼빈이 ‘튤립(TULIP) 교리’ 주장했다고 알고 있고, 칼빈이 중세교회의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구원하고 기독교의 체계를 세운 유일한 사람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지성사와 역사적인 맥락에서 16-17세기에 존재했던 위대한 개혁가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개혁주의의 완성자요 종결자가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에서 신학의 체계화의 기초를 놓은 훌륭한 인물이다.

‘튤립’ 교리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아르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그룹들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된 것이다. 튤립은 결코 칼빈의 전유물이 아니고, 칼빈주의의 전부도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무조건적 예정 등에 반론을 제기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수년간 논쟁을 거듭하다, 1618년 도르트 총회에서 칼빈주의가 승리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튤립’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칼빈의 영향을 받고 그의 가르침과 사상이 이 문서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작 칼빈은 이 문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튤립을 칼빈주의에 전부로 여기는 것은 신학을 제한하는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이 다섯 가지 범주를 기독교의 전부로 알고 여기에서 어긋난다고 누군가를 제단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와 상상력을 차단하는 것이 된다.

필자도 칼빈주의를 좋아하고, 흔히 말하는 신학에 있어서 주류 라인의 사상을 추구한다. 16-18세기 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특별히 부어주신 신학의 부요함과 광대함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때의 신학이 유일한 신학이라고 여기면서, 앵무새처럼 오늘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의 오류는 ‘튤립’만을 강조하고 칼빈주의를 사랑하면서, 성경을 강조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칼빈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여러 가지 일상의 비유를 통해 유머스럽고 익살스럽게 제시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만 구원과 생명이 있고 자신들의 교리만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칼빈주의의 튤립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이 없고 이단처럼 몰아가고 상대방의 허점과 약점을 지적한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에 정곡을 찔러야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긴다. 이렇게 교리로 상대방에게 폭력과 수치를 주니, 교만한 칼빈주의다.

칼빈주의의 본뜻은 그런 것이 아닌데, 언제부턴가 교리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 칼빈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구원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인데, 상대방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오해한다.

칼빈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의지하며 사는 것인데, 자기를 더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칼빈주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여기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그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지에 감격하며,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능력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신학으로 우쭐대고 ‘튤립’에서 벗어나는 신학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학에도 여전히 부족함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다른 신학을 인정하며 더 좋은 신학, 더 바른 신학을 찾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대를 아름답게 섬길 수 있는 신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개혁신학
▲제네바 빠스띠옹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pixabay.com
물론 칼빈주의는 16-18세기의 존재했던 거인들의 신학과 사상을 계승하고 이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오늘날로 바로 적용시키고 뿌리내리는 것이 칼빈주의의 역할이 아니다. 교리를 가지고 칼날을 휘두르며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신학의 목적도 아니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발전하고 적용한 신학이 있고, 오늘날은 이 시대와 사회를 위한 신학이 있어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칼빈주의자들이 다 정죄하고 버릴 수 있을까? 오히려 이들에게 사회와 인간에게 있는 아픔과 신음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신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신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게 하시는 부르심과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칼빈주의가 존중해줘야 될 것이다. 칭의와 구원이 약하다고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강점을 알아 공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칼빈주의에서 제일 경계하는 칼 바르트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전쟁의 폐허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구원하고 화해를 강조한 모습에서 배울 것이 충분하고 많지 않을까?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그 정신은 칼빈주의가 존중하고 칭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만인화해론과 만인구원론 때문에 적으로만 여기기보다, 집요하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그를 통해 우리의 구원론을 점검해 볼 필요도 있지는 않을까?

그 동안 칼빈주의는 본래 가지고 있는 신학과 사상의 의미를 벗어나, 교만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자신의 신학으로 축소하고 다른 이를 향해 정죄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칼빈주의는 예수님의 정신과 삶을 따르며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고 성경을 근거하여 사는 것인데, 자신의 ‘튤립’ 옹호를 전부로 여기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개혁주의자들이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정립하게 되기를 바란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