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가 자신의 저서를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개혁신앙에선 ‘믿음’을 ‘구원을 받는 손’ 정도로 이해하며, 믿음에 어떤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이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이해하는 신학적 기반으로 인해, ‘믿음이 공로화될까’하는 염려에서였다.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종교개혁 후 기존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로 고쳐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믿음이 단지 ‘구원의 수납 도구’로서의 지위만을 갖고, 구원 후엔 용도폐기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생 ‘믿음’으로 일관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사도 바울의 말은 그의 첫 회심 때의 각오를 피력한 것이 아니다. 평생 그래왔듯, 남은 여생도 그렇게 살겠다는 그의 만년(晩年)의 고백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을 받는 손으로서의 믿음’과 ‘삶의 지향(指向)으로서의 믿음’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믿음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 신앙’이나 ‘삶의 지향으로서의 신앙’이나, 모두 ‘예수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이다.

◈믿음, ‘받는 손, 드리는 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인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손’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예배, 기도, 감사, 선행, 봉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것’, ‘우리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 모두가 ‘믿음(그리스도 대속)’에 의존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존된 ‘봉사와 헌신’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을 매개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취하신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성도의 모든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취하게 하시는 빌미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모든 만족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드리는 모든 헌신, 심지어 순교까지도 그에겐 큰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을 생각나도록’ 할 뿐이다. 곧 ‘내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희생)이 이렇게 귀한 순교의 열매를 맺었구나’ 라며 아들의 희생을 되내이게 할 뿐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헌신, 충성에 의미 부여를 하여 으쓱해할 수 없게 만들며, 그리스도인의 모든 ‘봉사와 헌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할(골 3:17)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반으로 행한다’는 뜻이다. 또한 ‘믿음으로 예배한다’‘믿음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예배하고(히 11:4) 감사한다(골 3:17)’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를 하나님께 바칠 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쳤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2위이신 성자마저도 3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피를 하나님께 드렸다면(히 9:14), 하물며 죄인 인간이 어찌 ‘믿음(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지 않고 무엇을 직접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겠는가?

◈사랑도 믿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믿음 없이 되는 것은 없다. 심지어 최고의 지위인 ‘사랑’마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끼리의 사랑과는 달리 오직 ‘믿음(그리스도 대속)’ 위에서만 가능하다.

‘사랑의 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사랑’을 너무 중시하여, ‘하나님을 믿는다’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까지 했다. 어거스틴(Augustine) 역시 같은 견해를 취했다.

오늘도 ‘사랑’을 기독교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 중 유사한 견해를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사랑의 화신(化身)’이라도 된 양, ‘사랑’을 앞세우고 ‘믿음’은 홀대한다. 그러나 언제나 ‘믿음’이 모든 것의 기반이다. ‘하나님 사랑(마 22:37)’이던 ‘사람 사랑(딤전 1:5)’이던 ‘그리스도 신앙’과 더불어 있다.

믿음이 배제된 체 사랑을 말할 수 없다. ‘믿음 없는 사랑’은 ‘활주로 없는 비행기’ 같아서 ‘사랑’의 시작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또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믿음’은 처음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유인책 역할을 한 후, 자기 소임을 다 한 것으로 여겨 퇴장해 버리지도 않는다. ‘믿음’은 시종 여일하게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관장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라는 말씀은 그 셋의 ‘지위’와 ‘기원’이 동등하다거나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셋의 기초와 출발점은 언제나 ‘믿음’에 있다. 심지어 셋 중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은 ‘사랑(고전 13:13)’까지도 그것의 뿌리는 언제나 믿음이다. 믿음 없인 사랑도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전 13:7)’는 말씀 역시, ‘사랑이 믿음을 포괄한다’ 혹은 ‘믿음이 사랑의 부속적 개념’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뿐이다.
‘하나님 사랑’은 항상 ‘그리스도 신앙’과 더불은다. 하나님을 바라볼 땐 언제나 가슴에 그리스도를 품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인가, 믿음의 대상인가?’를 두고 헷갈려 한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바라보는 사랑의 대상’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삼위일체 신앙의 전형을 여기서도 맞닥뜨린다.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침

성경이 어떤 곳에선 ‘믿음을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처럼 말하다가, 어떤 곳에선 ‘목숨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 말하기도 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2-13).”

‘수단’이 갑자기 ‘목적’으로 등극한 것 같아 적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 혼란(?)은 ‘믿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르면 해소된다. ‘믿음이 수단’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성’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낮춘 ‘믿음’의 겸손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진 고유한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믿음’을 낮췄다 해서, 그것과 일체를 이룬 ‘믿음’의 지위가 무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아내가 남편을 돋보여 내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고 남편과 일신(一身)된 자기의 지위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그 뿌리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존위(尊位)시키는 것이고, 그것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고,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된다.

이는 성경이 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고 했는지, 또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계 14:12-13)”를 “예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행 15:25; 21:13)”로 고쳐 썼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