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예배, 디지털 세대, 청년,
ⓒUnsplash/Brooke Cagle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개역개정)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대부분 교회가 두 달 가까이 예배당 주일 예배 대신 가정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소위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는 이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예배당에서 드릴 필요 없다. 어디서나 예배드리면 된다. 앞으로도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등등의 견해가 그것이다. 보수측은 온라인 가정 예배를 비상시국 가운데 어쩔 수 없는 선택 정도로 여겼고, 진보측은 기존 공중 예배에 대한 대안으로까지 추켜세웠다. 최근에는 온라인 성찬식을 인정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발제자는 주일 예배 중단에 큰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 신학자 목회자에게 예배 신학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나서 더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대부분 교회가 명쾌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은 채 교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있다.

목회자는 주일 공중 예배를 드릴 때나 중단할 때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시하지 못하면 신자들이 혼란스러워할 뿐 아니라 예배는 결국 종교적 관습이나 사회적 모임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번 경우처럼 공중 예배가 상대화되면, 앞으로 평신도들은 한국 교회가 강조하던 ‘주일 성수’나 ‘성전 건축’에 대해 시큰둥하게 반응하지 않을까싶다.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발제자는 주일 예배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신학을 제공하고자 한다. 응용은 그 다음이다. 신학 없는 방법론은 공허하다.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예배신학 기본을 튼튼히 세운 뒤, 즉 성서적 예배 이해를 정확히 한 뒤 시대적 상황에 대해탄력성 있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발제자는 성전과 교회와의 관계, 예배의 정의, 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차례대로 설명 하겠다. 결론에서 예배 관련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열어둘 것인가에 대한 제언을 하겠다.

성전과 교회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시 139:7-10)1). 영어로는 omnipresence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자유 하시므로 어느 한 장소에 매여 있지 않지만, 유대인은 하나님의 거처를 특정해서 하늘로 보았다 (신 26:152) 왕상 8:303)).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앉으신다(사 6:14)). 지상에도 하나님의 거처가 있다. 성소(the Tabernacle)와 성전(the Temple)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이 거하시고 떠나신다.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은 성전에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신다(겔 4, 185)).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소와 성전에서 당신의 백성과 만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계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성소와 성전을 통해 임재(presence)하셨다(출 25:8-96) 왕상 8:1-21) (Peterson 2000: 858).

성막과 성전은 이스라엘 영성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종교성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였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막이 수축되고 제사 양식이 규정되었다(출25-30).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위해 진 중앙에 세워지고(민 2:17)),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출 29; 레 1:1-17: 16).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가대 활용(대하 5:12-138)) 등 예배양식이 발전했다.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 침공에 의해 파괴되었다. 스룹바벨성전(기원전 516년)완성)에 이어 기원전 20년경부터 헤롯이 성전을 크게 만들고 장식을 화려하게 꾸몄다. (Meyers 1996: 1096).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의 성전 제사와 포로기 이후 발전된 회당(synagogue)이 공존하고 있었다. 회당에서는 희생제를 드리지 않았고 주로 성경읽기와 기도가 행해졌다(Saldarini 1996: 1079).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이제는 예수와 성전 그리고 교회와 성전의 관계를 차례대로 알아보자. 단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성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 임마누엘이다(요 1:149) 마 1:2310)).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구체적인 몸으로 임재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이끈다. 구세주이며 화해자다. 대제사장이며 제물이다(히 9:2611) 요 1:2912)). 성전의 역할을 하신다(참고 Chilton 2005: 782). 반복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다(요 2:19-2113)).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전이고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성전이다(Alexander 2012: 23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임재의 진정한 핵심이다(Hays 2016: 176).

예수의 몸이 교회다(엡 1:2314)). 따라서 교회도 성전이다(고전 3:1615) 고전 6:1916), 여기서 ‘너희’는 복수다. 단수 ‘너’가 아니다. 즉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와 별개로 교회가 성전인 것이 아니다. 예수가 성전이기에 그의 몸인 교회가 성전인 것이다.

다시 분명히 하자. 교회는 성전인가? 당연히 그렇다. 예수가 성전이기에 교회도 성전이다. 분명히 교회는 성전 전통 가운데 있다. 그렇다면 예배당(church building)이 성전인가?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예수와 교회가 성전이지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은 교회 공동체이라는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다. 음식과 그릇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초대교회 가정 예배도 신자의 집이라는 예배당에서 드렸다. 가정 예배는 가족예배와 전혀 다르다. 다양한 신자가 특정한 신자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초대교회는 신자의 집(골 4:1517)), 회당(행 18:418)), 성전(행 2:4619))에서 모였다. 박해 시 주로 신자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고 (White 1993: 38) 기독교 공인 이후 예배당을 특징있게 건축하기 시작했다(Krautheimer 1965: 18). 예배당은 예배와 교육에 필요한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예배당 자체가 신학을 반영했다(McNamara 2009: 16). 회중의 예배에 대한 비전과 확신이 눈에 보이도록 예배당에 반영되었다(Long 2002, 65). 개신교 예배당은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예배당과 다르게 단순한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단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구약 성전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회당은 성전과 달리 제사 장소가 아니지만 성전을 본 따 지성소 휘장을 설치했고 모세 오경 두루마리를 보관했으며 등불을 켜놓았다. 예배당이 성전을 모방했든 회당을 모방했든 결국 성전 전통에 서 있다(참고 Block 2014: 322).

그리스도의 몸 즉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에서 קָהֵל(qahal), 신약에서 ἐκκλησίαekklesia)다 (Giles 1995, 2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고 성령 안에서 확증을 가진 이들을 교회 공동체로 묶으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로 성장한다 (Küg 1967, 82). 성서는 이것을 산돌/모퉁이 돌이신 (벧전 2:4-720) 엡 2:2021))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간다(엡 2:21-2222))고 표현하다.

예배의 기원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언약적 만찬시 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고전11:23-2923) 눅 22:14-2024)) (알멘 2010: 17). 예배의 기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 예배 기원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수많은 혼란이 야기된다. 예배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명심하자.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자의 경배를 받는 객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배란 인간 종교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하신 크신 일을 찬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다가오셨기에 사람이 응답하는 것이다. Donald Bloesch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대한 [회중의] 창조적인 응답이다. 그 응답은 찬양, 선포, 기억, 기도의 형태를 취한다” (Bloesch 2002, 119).

교회의 가장 숭고한 목적이자 활동은 곧 예배다(참고 Van Dyk 2005, xv). 예배를 통해 신자는 그들이 계약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거듭거듭 확인한다. 관계의 확인이다(vander Kooi & van der den Brink 2017, 324). 관계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매번 찬양하고 배우고 순종하는 가운데 자아를 벗어나서 관계적 인간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된다(참고 Witvliet 2005: 25). 따라서 예배는 다른 모든 활동에 진정성을 불어넣는다. 예배 없는 활동 선교 신학 그 무엇이든지간에 쉽게 동력을 상실하고 오염되기 쉽다.

최근 드러난 예배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는 사사로이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확립된 정의는 ‘corportate worship’이다. 한국어로는 공중 예배라고 번역한다. 사사로운 예배가 아니라는 뜻이다. 동방 정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인 George Florovsky의 인간관(‘기독교인은 교회적 존재, 즉 공동체적 존재’)을 활용해 감리교회 예배학자 James White는 예배는 공동체로 드려야 하고 하나님은 공동체 예배 가운데 거하심을 분명히 한다(White 2000:23). 미국 장로교회 대표적 조직신학자인 Michael Horton은 개인주의적 영성은 종교 개혁자들이 반대하던 것이라고 일갈한다(Horton 2008, 77). 물론 공동체에 개인이 매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공동체가 예배드리면서 개인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 맘과 몸을 다해서 경배한다. 그러나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 교회공동체를 떠난 개인주의적 예배 옹호는 전혀 반기독교적이다. 개개인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 공동체에 연합하여 더불어 예배한다. 이 점에서 예배학자 Evelyn Underhill이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했다: ‘기독교인의 예배하는 삶은 심오하게 개인적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의 일원으로서다’(Underhill 1948: 83). 존 웨슬리도 고독한 개인주의적 종교 (‘solitary religion’)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단언했다(Wesley1831: 593). 그렇다면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도 여전히 연합한다는 감을 느끼면 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예배에서 공동체성이란 감이 아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실제적 구체성이다(Bouyer 1982, 294). 교회의 몸 성(구체성, 현실성, 실제성, corporeality)은 구체적 개개인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도 있지만, 성찬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단지 교회는 예수를 마음으로만 생각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예배 가운데 그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 그의 몸에 연합한다.

다음으로 주일 예배를 생각해 보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공중 예배와 주일 예배, 즉 주일 공중 예배에 대한 해체주의적 생각이 스며들고 있다. 예배는 아무 때나 드릴 수 있나?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리교 운동 당시 즉흥적 예배에 대한 존 웨슬리 입장은 확고했다: 모든 신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한다. 물론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에서 일어나는 예배를 경시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영국 성공회 주일 예배를 대체한다고 보지 않았다(George 1996, 32).

유대인에게 성전과 안식일이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날이었듯이 초대 기독교인에게 주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순교자 Justin의 2세기 기록에 따르면, 교인들은 일요일에 모였다. 인근 각처의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읽고 성만찬을 하고 연보를 하고 온갖 좋은 일에 대한 교훈을 들었다(Weber 2008: 92. 93). 안식일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초대 교회는 이방 기독교도에게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지 않았다(Bradshaw 2010: 84).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White 2000: 50, 53). 단지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중요했다(Bradshaw 2010: 86; Johnson 2006:63).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 교회는 숫자의 많음과 적음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모신 신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니지만, 성전인 주님과 연합했다는 점에서 교회는 성전이다. 주님은 우주적이지만 특히 신앙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신다. 교회, 곧 신앙 공동체를 떠난 사적 예배는 가능하지만 성서적이지 않다. 권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배는 더불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일은 거룩한 주님의 날이다. 주일 공중 예배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온 가장 성서적이고 신학적 예배다.

온라인 예배 이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주일 공중 예배가 중단되는 사태가 왔을 때 인터넷이 큰 역할을 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니 좋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위기 때 활용도가 높다. 평소 홍보용과 전도용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가 주일 공중 예배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온라인 예배가 주일 공중예배를 보조할 수는 있으나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영지주의적이다. 영지주의는 몸을 거부한다. 성육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반대한다 (Hall 2009: 51, 52). 같은 논리로, 온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거부하는 것이 영지주의다.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 성도가 지체로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한다면, 온라인 예배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배드린다 하더라도 온라인 예배는 여전히 관념의 세계다.

둘째,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를 조장한다. 교회는 모든 담을 허문다. 인종 남녀 빈부 계급 정당 선호 등을 뛰어넘어 함께 예배드린다. 온라인 예배는 개인주의와 가족주의 담 안에 머물게 한다.

셋째, 영적 성장이 불가능하다. 설교나 예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저기 채널을 바꾼다. 기독교를 소비한다. 결국 설교가 약한 교회는 신자를 잃게 된다.

결론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회와 교회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악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지구가 모처럼 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소비지향적인 삶을 반성하면서 혹시 대안적 삶이 가능할지 모색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예배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있다.25)

예배로 좁혀서 어떻게 할 것이냐를 제안하겠다.

첫째, 예배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교회 핵심은 하나님 백성의 예배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된다. 주일 예배당에서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 예배가 왜 양보 불가능한 것인지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시대 흐름에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게 된다.

둘째, 행사를 줄여나가고 예배에 집중하자. 예배가 확신과 생명력을 준다. 존 스토트 목사는 주중에 교인들이 너무 자주 교회 들락거리면 야단쳤다고 전해진다. 예배드리고 나서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지 왜 자꾸 교회에서 소일하나며 싫어했다.

셋째, 본질과 비본질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온라인 예배는 본질이 아니다. 보조적으로 활용하자. 젊은 세대가 인터넷 다루는데 익숙하다고 해서, 그리고 점점 개인주의 풍조가 강해진다고 해서 그것에 영합만 할 수는 없다. 교회는 문화를 활용도 해야 하고 변화도 일으켜야 한다. 온라인 예배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성찬도 신학적으로 온전치 못하나 애찬(love feast) 정도로는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비본질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발휘하자. 그러나 본질은 지키자.


임성모 교수(웨슬리안 조직신학연구소장)
▲임성모 교수(웨슬리안 조직신학연구소장)

임성모 목사
감신대 및 대학원 졸
에모리 Th.M
예일대 S.T.M
옥스포드대 Ph.D
강화권능교회 담임 역임
현)웨슬리안 조직신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