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청교도들의 신학은 유럽 종교개혁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중요한 교리들을 계승한 것이다. 개인의 구원에 관련하여서는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를 완전히 버렸다. 청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의 체제와 신학사상을 철저히 영국에서 거부했던 것은 이미 유럽에서 “트렌트 종교회의 선언서”(1545)를 통해서 루터의 사상과 종교개혁자들을 완전히 정죄하려 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구원론을 정립함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일반적인 공식, 즉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오직 은혜로만” (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이런 원리들이 없이는 로마서 1장 17절을 근거로 하는 구원교리를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란 개신교회의 하나의 특별한 부류를 의미하는데, 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면서도, 루터파보다는 칼빈주의와 연결된 사람들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이 칼빈주의에 더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중요한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영국에 피신을 하면서 직접 전수해 주었기 때문이다. 크랜머의 초청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온 마틴 부써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온 저명한 신학자였다. 1551년 2월에 사망했다. 피터 마터 버미글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로서 활약했으며, 파기우스 (Paul Fagius)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헬라어 교수가 되었다.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지지하던 폴란드인 라스코는 한 때 오 천 명이 넘는 피난민들의 교회를 인도하였다.

청교도들의 주류는 열정적인 칼빈주의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체험적으로 따뜻하고 서로 강인한 믿음을 공유하면서, 교회에서는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드높이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균형 있게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다. 청교도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킨 2세대 지도자들인 칼빈, 베자, 불링거, 부써, 그 밖에 칼빈주의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1540년대 이후로 영국교회를 한층 더 개혁시키고자 노력했던 청교도들은 한편으로는 교황청의 예전을 따라가지 않으려 했고 주교체제에도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루터파의 미진한 종교개혁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초기 청교도들의 신학적인 특징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은 루터와 멜랑히톤 등 독일에서 형성된 루터파 신학자들의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특히, 기독론과 성만찬 신학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루터파 교회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시행하고 있어서 비성경적인 관습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청교도 신학의 최고봉이라고 알려진 존 오웬의 엄청나게 방대한 저술들 속에는 루터의 저술들을 인용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주 드물게도,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련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한 것이 전부다. 오웬은 압도적으로 칼빈의 저술을 인용하여 자신의 성경해석에서 토대로 삼았다.

청교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보다 강력하고도 뚜렷한 개혁교회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의 신앙은 점차 다양한 교리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해설을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여 나갔으며, 마침내 그 진수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3-38)에 담아서 발표하였는데, 당시 유럽대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청교도”는 영국 국가교회의 주교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각 지역의 교구담장 신부들과 주교들은 여왕을 교회의 머리로 하는 국가교회체제 (성공회, Anglican Church) 의 교회규칙에 서명을 거부하고, 규정된 복장과 모자 착용을 거부하는 청교도들을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낙인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청교도는 결코 교회에 관련된 사상이나 신학적 입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외 국가의 다양한 구성원들로서 정치, 문화, 문학, 음악 등 전반에 관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남겼다. 패트릭 콜린슨은 “청교도주의란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 행동과 정치적인 것을 다 포괄하며, 독특한 하나의 개신교”라고 규정했다.

영국 국교회 체제를 거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가담했었다. 청교도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장로교회파와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정치를 옹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 백 명에 달하는 청교도 신학자들과 지도자들 중에서 정통 신학을 펼친 인물들로 각 시대를 대표하는 분들을 손꼽아 보면, 초기에는 리챠드 그린햄 (Richard Greenham, 1540?-1594), 리챠드 로져스 (Richard Rogers, 1551-1618), 토마스 카트라잍 (Thomas Cartwright, 1535-1603)과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1602), 최고의 절정기의 신학자들로는 토마스 굳윈 (Thomas Goodwin, 1600-1680),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윌리엄 에임즈 (William Ames, 1576-1633) 등이 있다.

16세기 중반에서부터 시작해서 18세기 초반까지 청교도 목회자들로 저술을 발표한 분들은 5 백 여 명에 이른다. 적어도 열가지 이상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주류는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이지만, 일부는 온건파로 영국 국가교회 체제 안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침례교, 독립파, 알미니언주의자, 분리주의자들도 여럿이 있었다.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와 같이, 전혀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신학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도 있다. 오웬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백스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론과 값없이 주시는 칭의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율법주의자 백스터는 구원에 이르려면 신앙에의 순종, 즉 회개를 필수적으로 동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웬만이 아니라 굳윈과 맨톤 (Thomas Manton, 1620-1677)에 대해서도 거부했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청교도들이 혼재해 있으므로, 선별하여 평가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크롬웰 사망 이후로 잉글랜드 정치가 혼란기를 수습하고, 다시 챨스 2세의 왕정체제로 복귀되면서 청교도들의 입지는 위축되고 만다. 1662년에 발표된 “통일령” (the Act of Uniformity)에 따라서, 공동기도서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영국교회의 체제를 따르지 않던 2천여 명의 청교도 목회자들이 추방되었다. 이 때에 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은 감옥에 던져지게 된다. 장로교회와 독립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온건한 성직자들도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다. 그 후로 청교도들의 사상은 교회와 국가와 교육기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윌리엄과 메리가 영국의 군주로 등장하는 “명예혁명” (1688년)이 이뤄진 후에야 비로소 관용정책이 발표되고, 다시 청교도들에게 제한적이나마 자유가 주어졌다. 다양한 예배방식들이 도입되고, 장로교회와 회중교회가 서로 통합되었고, 교회마다 자율성이 존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