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19세기 영국에서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이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했을 때, 계몽주의에 물든 동시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이 어찌 불의한 자의 하나님일 수 있느냐? 당신의 설교는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 걸 어떡하나? 그것은 스펄전의 말 이전에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롬 4:5)’하나님을 말씀한다. 그는 너무 절망적이어서 도무지 손댈 수조차 없는 ‘인간 말종(末種) 쓰레기들’을 구원하신다.

동족의 흡혈귀인 세리 삭개오를(눅 19:9), 창녀 같은 사마리아 여자를, 간음 중 붙잡힌 여인을 구원한 것은 그 확증이다. 이들은 누가 보더라도 ‘저 정도라면’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당시 그들만이 ‘인간 말종 쓰레기들’이었을까? 아니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비쳤을 뿐이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말종 쓰레기’들이며, 다만 ‘자신이 말종 쓰레기인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요 9:41).

간음 중에 붙들린 여자를 자기에게 고소한 군중들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가버린 것(요 8:9)”은 그들 모두가 그 여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증거다.

‘영혼의 MRI(자기공명 영상장치)’인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받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마 23:27),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 독설하신 것은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말한 것이다. 그동안 용케도 잘 숨겨 왔다가, 예수님 앞에서 들통이 난 것이다.

인간의 죄된 실상에 대한 폭로는 그들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것을 인류 전체로 확장시킨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 3:13-15).” 한 사람도 예외 없는, ‘인류의 악함’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 말종 쓰레기들’을 구원하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런 자들이라야 당신의 능력과 은혜가 돋보일 수 있고, 백골난망(白骨難忘)하여 평생 그의 영광을 위해 살겠기 때문이다(엡 1:6).

◈하향 평준화시키는 인간의 죄

흔히 ‘그리스도의 의(義)’는 호지 않은 제사장의 ‘통옷(whole cloth, 레 6:10, 출 28:32, 요 19:23)’에 비유된다. 예수님의 동시대인이었던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대제사장 관복은 호지 않고 통(通)으로 짜졌으며, 실제로 예수님이 입은 속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통옷이었다(요 19:23)’고 했다.

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통옷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연상시킨다.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싸는 ‘통옷(whole cloth, 通衣)’의 형태는 ‘인간의 부패성’이 어느 한 곳도 가림이 필요치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전인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전인적 부패성은 종종 ‘머리부터 발까지 나균(Mycobacterium leprae)으로 감염된 한센병(Leprosy) 환자(레 13:12)’에 비유됐다.

이 통옷 ‘그리스도의 의(義)’는 ‘우리의 죄의 수치’만 가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랑’도 가린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에 오염된 인간의 덕성, 의행(義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통옷 ‘그리스도의 의’는 빈부, 신분의 차별을 없애는 유니폼(uniform)에 비견된다. 과거 교육부에서 일률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힌 때가 있었다. 처음 그 안(案)이 나왔을 때,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했다.

그들이 내건 명분은 그것은 일제(日帝)의 잔재요,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동일한 유니폼을 입으면 부잣집 아이들이 그들의 부티(sleekness)를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왜 거부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만하게 한다. ‘인간의 의’를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만들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니, 자기들이 자랑하고 싶은 ‘율법적 의’를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첩경을 평탄케 한 세례 요한이 ‘낮은 곳은 높이고 높은 곳은 낮추는(눅 3:4-5)’ 중향평준화(中向平準化)를 지향했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인간의 의(義)를 부정하여 하향평준화(下向平準化)를 했다.

이렇게 하향평준화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칭의(稱義)’를 등급화하여 ‘교인’을 복자(福者), 성인(聖人)으로 나누고, ‘성직’을 부제(Deacon), 사제(Priest), 몬시뇰(Monsignor),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 등으로 나누는 로마가톨릭의 성직계급주의(hierarchism)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를 차별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롬 3:22)’ 교리가 그런 구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의 원죄’는 모든 인류를 ‘동일한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의’는 믿는 자 모두를 ‘동일한 의인’으로 만들었다(롬 5:19).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다(갈 3:27).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역시 믿는 자의 ‘의(義)의 무차별’을 말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듯,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어떡할까’ 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그런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선행으로 자신들을 꾸미며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안간힘’을 구원의 증거로 승인해 주시지 않는다. 설사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더라도, ‘기쁘게 자원하여 드리는 복종만 받으시는(신 16:10, 시 51:12, 고후 9:7)’ 하나님의 속성상, 억지춘향으로 드리는 것은 그에게 열납 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자기에게 ‘구원받은 자로서의 증거’가 안 보인다고 두려움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가? 차라리 그 알량한 ‘율법적 안간힘’의 무용함을 깨달을 때까지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라.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의 긍휼을 의지하라. 아니 그의 긍휼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원리는 오직 ‘그의 긍휼하심’이다(딛 3:5, 엡 2:4).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보증이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버리진 않는다는 약조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초신자(初信者)’, ‘기신자(旣信者)’를 불문한다. 혹자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신자’에겐 관대하지만, 알 것 다 아는 묵은 ‘기신자’에겐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초신자’에겐 ‘긍휼의 잣대’로 기신자(旣信者)에겐 ‘율법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순전히 ‘상식’과 ‘일반의 종교적 관념’에 근거한 막연한 추정이다. 하나님껜 그런 구분이 없다. 그에겐 초신자(初信者), 기신자(旣信者)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유약한 자녀이다.

구순(九旬)의 부모에겐 70 먹은 자식도 ‘차(車)조심’을 당부할 만큼 유약한 아이이듯,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항상 철부지이다(시 103:13).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찬 456장).”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율법주의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생각처럼 재판장이 죄수 보듯, 종교 교주(敎主)가 신도 보듯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언제나 ‘아비가 자식 보듯’ 하신다.

그리고 육신의 부모가 유약한 자식을 더 애틋하게 여기듯, 하나님도 덜 떨어진 그의 자녀를 더욱 긍휼히 보신다.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두려워 마시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내치실 일은 없다. 오히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신다(찬 411).”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에서가 아닌, 인간의 ‘절망적인 무능’에서 성취된다. 썩은 거름더미에서 생명이 싹을 틔우듯, 하나님은 문둥병자같이 썩어 문드러진 죄인 안에서 구원의 싹을 더 잘 틔워내신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