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광신대 졸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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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오면 제 머릿속에는 항상 5.18 민주항쟁이 떠오릅니다.
저는 주님의 소명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 난생 처음 광주로 가서 광주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5월에 5.18민주항쟁을 맞았습니다.
그때 나이 만 19세였습니다. 당시 저는 뚜렷한 역사의식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감격과 믿음, 성령 충만한 삶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수부대가 광주를 점령하여 금남로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그 길을 걸어서 조선대학교 앞에 있는 광주서광교회를 다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때 그것이 저의 젊음의 자랑거리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저와 동시대에 호남신학교를 다니던 문용동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보다 여덟 살 많은 호남신학교 4학년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지나가다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진압봉으로 맞은 시민을 업어서 기독병원 응급실에 데려다주고, 그 날부로 시민군에 참여합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얼마나 그가 의협심에 불타고 정의감으로 가득 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수도경비사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화약과 탄약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을 때, 도청 지하실에는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8톤짜리 트럭 네 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민군 강경파에서는 공수단이 도청으로 진격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광주시의 3분의 1 가까이 희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용동은 광주전투교육사령부의 김기식 부사령관을 찾아가, 탄약을 제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김기식 장군은 탄약 분해 전문가인 배승일 군무관을 비밀리에 급파해 문용동과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했습니다.
그 이후, 문용동은 도망가면 살 수 있었는데 끝까지 그곳을 지키다 헬기 사격으로 죽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안전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훗날 그는 군 정보사의 공작에 의해 프락치로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그의 일기장에 의해, 그는 프락치가 아니고 거룩한 의인이요, 순교자로 드러나게 된 것이죠.
▲새에덴교회 성도들과 광주 금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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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금남로 길을 다녔던 광주 신학생 소강석은 살려 주시고, 탄약고를 지키던 호남 신학생 문영동은 왜 의로운 죽음을 당하게 하셨을까. 나는 과연 산 자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새벽길을 간 사람이고, 저는 지금 살아서 캄캄한 암흑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웃고 있고, 저는 살아서 울고 있습니다. 그때는 역사의식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용동의 역사 혼을 가지고 산 자의 값을 치르려고 울며 고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산 자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저는 그 해 5월의 하늘을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