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려
▲격려하는 말과 행동은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을 실어주는 효과가 있어 사람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pixabay
본문: 요한복음 2장 13-17절


지식의 저주

1990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 전공 대학원생이었던 엘리자베스 뉴턴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잘 보여주어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에게는 두드리는 역할을, 다른 한 팀에게는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어떤 곡인지 맞추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듣는 팀은 약 120여 곡 중 단 3곡밖에 알아맞히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징글벨’처럼 간단한 박자의 노래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는 무슨 곡인지 정확히 맞추기 어려워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듣는 팀이 몇 곡을 맞출 것 같은가?’라고 질문했더니 절반 이상은 맞출 것 같다고 답을 했습니다.

뉴턴은 이 실험을 통해 소통의 치명적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알겠지’라고 여기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이 곡이 징글벨인지 알고 박자를 전달하고 있지만, 상대방에게는 그저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당연히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너는 아직 이것도 모르냐’며 꾸중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익숙함의 장점과 단점

우리의 삶은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를 합니다. 그런데 낯섦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합니다.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도자기를 빚고 굽는 모든 것은 낯섭니다. 시간이 지나 도자기 만드는 실력이 늘어서 처음 가졌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도자기뿐 아니라 모든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 그 기술이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은 교회 자체가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용어도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다 낯섭니다.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져서 예배도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 아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빨리 익숙해지려고 하고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은 어떤 맛일까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머니의 손맛 아닐까요? 그런데 과연 어머니가 해준 것이 제일 맛날까요?

물론 음식을 정말 잘하시는 어머니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손맛을 최고의 맛으로 느끼는 것은 익숙함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골식당을 찾아갑니다. 단골 메뉴를 먹습니다. 뷔페집에 다양한 음식이 있어도, 늘 먹던 메뉴의 음식만 먹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가 늘 다녔던 길로 다닙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좀 달라졌지만,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보면, 거의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지정석 같아요. 늘 앉던 자리에 앉으십니다.

익숙함은 분명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편안함을 줍니다. 이 외에도 여러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익숙함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듭니다. 안일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안주하게 만듭니다.

가족의 익숙함에서 탈출하라

예전에 ‘가족 시간 계산기’라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의 한 검진센터에서 건강검진 결과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 상태라면 몇 개월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과지 보고 계시면 차근 차근 설명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선 방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의사에 말에 충격을 받고, 건강검진 결과지를 펼쳐보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많이 놀라셨죠? 앞이 캄캄하셨나요?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보통 몇 시에 퇴근하시고, 하루 몇 시간을 주무시나요? TV는 얼마나 보세요?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당신의 인생에서 그 시간들을 빼면 남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9개월, 어떤 사람에게 6개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과지를 보면서, 대부분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가족은 늘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해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익숙해져서 함부로 대하고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족에 대한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가족은 늘 내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난 4월 29일 경기도 이천 물류센터에서, 화재로 인해 근로자 38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하신 분들은 대부분 일용직이었는데, 안타까운 사연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분은 혼인신고를 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남편을 잃었습니다. 딸의 생일날 사고를 당한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딸과 함께 생일을 함께 보낼 생각으로 들떠 있었는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남편과 동생을 한꺼번에 잃은 분도 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고등학교 1학년 된 딸만 두고 사고를 당한 아버지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은 늘 나와 항상 함께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달 5월을 맞이하면서, 가족에 대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가족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의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이 땅의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땅의 것을 쌓으려고만 하면 안 됩니다. 이 땅의 생활을 너무 편안하게 생각하고 이 땅에 머물고 싶어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소속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미련 없이 ‘예’ 하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은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것에 대한 감사를 종종 잊어버립니다.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고통이 일상이 되면 더 나은 삶을 위한 동기를 잊어버립니다. 곧 고통을 이겨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익숙함은 굉장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과 신앙이 익숙함에 젖어 있지는 않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점매석이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전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성전이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담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먼저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이방인의 뜰이 나옵니다. 그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나오고,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이스라엘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 나옵니다.

번제단과 성소는 제사장의 뜰에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곳은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첫 번째로 나오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의 뜰에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거나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하면, 자신들이 특별히 구별해 기른 소나 양을 사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종교지도자들이 매점매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외국돈이나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진 돈으로 헌금하지 말고, 성전에서만 쓰는 세겔로 바꾸어 헌금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성전에서 소, 양, 비둘기를 사서 제사를 드렸고, 돈을 성전의 세겔로 바꾸어 헌금을 했습니다. 실상은 종교 지도자들이 소나 양을 비싸게 팔아서 이득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전 차액을 그들이 챙긴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과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신문이 있었다면 1면을 장식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잊어버린 이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

익숙함은 편한데, 탈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 사람들은 익숙해지면 편하니까 거기에 머물려고 합니다. 안주하려고 합니다.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그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백성들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자 아무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익숙함에 젖어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익숙함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님은 <그대 느려도 좋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겨운 나를 만나고 쉽지 않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지 않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과거로의 회귀를 막고 새로운 것에 흥분된 삶을 살려면 응고된 생각들이 물처럼 계속 흐르도록 물꼬를 터야 한다. 생각의 나무를 키우고 사상의 집을 세우고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고 모든 것에 반응해야 한다.”

이규현 목사님은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익숙함과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합니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신앙의 익숙함에서 탈출하라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신앙의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신앙에는 ‘됐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

바울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 까지 이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면에서 성장해서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익숙함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신앙의 익숙함을 탈출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코로나19 이전의 교회와 이후에 교회의 모습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거의 두 달 동안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랫동안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목회자들은 젊은 층이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 질까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로 인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우리는 마지막 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익숙함에 탈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익숙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용기입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을 잃는 건 가벼운 손실이다. 명예를 잃는 건 꽤 큰 손실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건 모든 걸 잃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도 신화속의 영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두려움은 있지만 그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낯선 곳으로 떠날 용기를 지닌 인간이다.”

익숙함을 탈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익숙함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용기를 내야 합니다.

펭귄들이 무리를 지어 빙판 위를 걸어갑니다. 더 나은 서식 장소를 위해 옮겨 다니는 대규모의 펭귄 무리는 남극에서는 아주 흔한 모습입니다.

펭귄 무리들이 빙판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바다로 헤엄을 쳐야만 건너편 빙판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바닷속에는 범고래나 바다표범와 같이 펭귄을 위협하는 천적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여기를 지나가지 않으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 땅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펭귄들이 주저할 때 최초로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이 있습니다. 연약한 펭귄들은 무리를 지어 자신들을 보호하지만, 이 첫 펭귄은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바닷속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모든 펭귄 무리가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목표를 위해 이 펭귄은 과감하게 바다에 뛰어듭니다. 이 최초의 펭귄이 먼저 용기를 내어 뛰어들면, 다른 펭귄도 용기를 내어 줄줄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선구자 역할을 하는 이 펭귄을 ‘더 퍼스트 펭귄’이라고 부릅니다. ‘더 퍼스트 펭귄’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순신 장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유관순 열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자신의 익숙함을 탈출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지나 씨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될까 하지 말고 ‘된다’로, 할 수 있을까 말고 ‘할 수 있다’로, 안 된다 말고 ‘하면 된다’로, 불가능하다 말고 ‘가능하다’로, 답이 없다 말고 ‘찾으면 있다’로, 의심은 버리고 굳은 심지와 용기를 가져보세요. 어떤 일에든 긍정적인 마인드로 도전해 보세요.”

익숙함으로 나태해진 부분이 있으십니까? 익숙함으로 인해 안일해진 부분이 있으십니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보십시오. 도전해 보십시오. 익숙함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기에 믿음을 더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기에다 한 가지 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을 믿고 용기를 냅니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면서 용기를 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면 됩니다. 요한1서 5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4)”.

우리가 믿음의 용기를 가질 때 익숙함을 탈출하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던 것은 믿음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골리앗은 3m나 되는 거인 장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해도 그와 싸우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아무도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삼상 17:45-46)”.

다윗은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자신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기는 허무맹랑한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고 승리하였습니다.

익숙함이 골리앗처럼 커 보여도. 세상이 골리앗처럼 커 보여도, 우리에게 믿음의 용기가 있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가만 들고 있으면 바람개비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잡고 달리면 그 속에 바람이 일어나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됩니다.

익숙함을 탈출하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익숙함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람개비를 잡고 달려가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믿음의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