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론(universalism)’과 오캄(William of Ockham)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와 개인주의의 이념적 근거가 됐을 뿐더러 여러 철학적 논거들을 제공했고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보편성(universality)을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에, 후자는 기독교의 유일성(exclusiveness)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에 기여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보편성(universality)’에 대한 경계를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왔으나, ‘지나치게 보편성을 제거함으로서 생기는 폐단’에 대해선 주의가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건전한 개혁신학은 언제나 둘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수십 년 전 <종교성 없는 기독교는 가능한가?>라는 책이 발간된 적이 있다. 당시의 기억으론 ‘종교의 보편성’에 강조점을 둔, 곧 ‘기독교의 유일성’을 물타기하려는 종교다원주의적인 관점에서 씌어졌던 것 같다. 결론은 ‘종교성 없는 기독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려는 ‘보편성(universality)’은 반대로 기독교의 ‘유일성(exclusiveness)’을 세우기 위함이다. 곧 ‘유일성’을 위해 ‘지나치게 보편성을 제거함‘으로서 생기는 부작용을 막자는 것이다.

‘유일성’도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찾아야지, ‘보편성을 지나치게 제거’하면 ‘유일성’이 설 기반마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을 특징짓는 ‘개성(individuality)’이라는 것도 인간이라는 ‘보편성’속에서 찾아야지, ‘보편성’이 결여된 인간의 ‘개성’이란 ‘기괴(奇怪)한 괴팍성(乖愎性)’일 뿐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이들 중 간혹 대화가 불능한 꽉 막힌 꼴통(?)들을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말은 구구절절 옳으며,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그런데 그들과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숨이 막혀온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이 지나치게 ‘유일성’에 경도돼, ’보편성‘의 감각을 상실한 때문이다. 그들에게선 도무지 동류(同類)로서의, 동시대인으로서의 공감대가 찾아지지 않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 종교개혁 시대 속으로 들어 가버린 사람들 같다.

◈보편성은 개체성을 훼손하는가?

기독교가 종교의 ‘보편성’을 공유한다 해서, 그것의 ‘유일성’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Plato) 철학의 ‘이데아(Idea)’가, 불교의 ‘극락(paradise, 極樂)’이 기독교의 천국 개념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인간 안에 신(神)이 있다‘는 힌두교(Hinduism)의 범신론(pantheism, 汎神論)이 기독교의 ‘성령 내재론(immanence)’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부처의 자비에 감격해 밤새 뛰노는 정토종(淨土宗, 일본에 본산을 둔 불교종파)의 ‘법열(rapture, 法悅)’이 기독교의 ’구원의 기쁨(벧전 1:8-9)‘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동일 원리로, 이교적 신비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기독교의 참된 신비 체험이 부정될 수 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와 미신에 거부감을 가진 종교개혁 세대(世代)의 ’반(反)체험주의 정서‘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86-1834)로 대변되는 ’정서적 신비주의(emotional mysticism)‘를 불러들였다는 비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 신비 체험을 무조건 맹신하지도, 무조건 부정하지도 말 것을 권면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말은 호소력이 있다.

일부 ’방언‘에 대한 비판도 힌두교나 불교 같은 이방 종교에 ’방언‘이 있기에 그것이 잘못됐다는 ‘반보편주의(反普遍主義)’의 논거로 행해져선 안 된다. 모든 비판이 그렇듯, 이 역시 철저히 ‘성경적’인 논거로 해야 한다.

단지 ‘반보편주의’에 근거한 비판은 이슬람(Islam)이 기도하고 금식하니 기독교인이 이슬람이 안 되려면 기도와 금식을 하지 말아야 하고, 불교인(Buddhist)이 채식주의자이기에 기독교인이 불교인이 안 되려면 채식주의자가 되면 안 된다는 논조처럼 돼 버린다.

기독교의 ’유일성‘을 세우려고 무리하게 ’보편성‘을 공격할 때, ’유일성의 기반‘까지 허물어버려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함께 버리고(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는(矯角殺牛)’ 결과를 초래한다.

죄인이 거듭난다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천상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중생하기 전처럼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을 가며 TV를 보고 울고 웃는 ‘보편적인 삶’을 향유한다. ‘인간의 보편성’자체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영적이면서 보편적인 인간

기독교인이 된다 해서 식욕, 성욕, 안정욕구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인, 불교인, 무교인을 불문하고 인간의 본능은 보편적이다.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만족감을 느끼고,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선수가 골을 놓으면 함께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기독교인이기에 생득적인 인간 본성마저 차압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금욕적인 경건주의의 가르침이지, 성경적 가르침은 아니다. 물론 인간은 부패했기에 어느 정도 절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절제(temperance, 갈 5:23)’이지, ’금함(Forbidding, 딤전 4:3)‘은 아니다.

혹자는 ‘환희’와 ‘열광’을 이교적(paganic, 異敎的) 광신(狂信) 행위로 여겨 아예 반정서주의(反情緖主義)를 표방하며, ‘지적(知的)’이고 ‘의지적(意志的)’인 신앙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환희’와 ‘열광’을 정죄하지 않는다(렘 48:33, 삼상 19:23).

성경에는 ‘구원의 기쁨’을 ‘절제되지 않은 극적 고조감’으로 표현한 구절들이 많다.

“믿고 말할 수 없는(inexpressible)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9)”,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 126:1-2).”

또 혹자는 ‘영적인 것’과 ‘인간 감정’을 두부 자르듯 하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어야지, 타락한 인간 ’감정‘이 개입돼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 둘을 두부 자르듯 할 수 있는가?

이는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일뿐더러, 둘이 서로 상호 교호적으로(interactively) 읽혀있어 분리가 불가능하다.

성경 역시 같은 어조로 말한다. ’기쁨‘을 ’성령‘안에 예속시키기도 하고(눅 10:21, 살전 1:6) 혹은, 둘을 불가분리의 대등 관계에 놓기도 한다(행 13:52).

신앙에서 ’감정‘을 배제하거나 분리시키는 것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고, ‘지정의’의 ‘통합적 인간론’과도 배치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풍부한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때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습 3:17) 울기도 하시며(요 11:35), 격노하시며(요 2:14-16) 한탄하시며(창 6:6) 근심하신다(엡 4:30). 그의 형상을 빼닮은 인간이 그것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보편적인 것은 천박한가

기독교 내에서 ‘보편성’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 중 하나가 ‘교회 음악’이 아닌가 싶다. 어떤 교회에선 대중가수를 초청하여 가요를 부르게 하여, 교회가 예배당인지 공연장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일부 개혁교회에선 지나치게 감정을 억제해 찬송을 부른다. 푹 가라앉은 그들의 찬송을 들을라 치면, 중세 스토아주의(stoicism)의 산물인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s)’가 연상된다.

전자도 문제지만, 후자도 문제다. 마치 그들은 찬송 시 감정을 발산하는 것을 세속화요 타락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이 점에선 루터(M. Luther)가 훨씬 자유롭다. 종교개혁과 함께, 루터의 또 다른 업적이라면, 교회 음악을 ‘보편화’시킨 점이 아닌가 싶다.

그는 지나치게 감정이 억제되고 전문화된 중세의 장중한 교회 음악을 단순하고 쉽게 보편화시켰다. 동시대의 개혁자 츠빙글리(Ulrich Zwingli), 칼빈(John Calvin)이 ‘시편 찬송가’만 고집한 것과는 달리,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하며 뛰어난 그의 음악적 자질을 교회음악에서 마음껏 발휘했다.

세인트 폴 컨콜디아 대학(Concordia college, St. Paul) 게바우어(V. E. Gebauer) 교수가 ’루터의 음악‘을 평가한 다음의 말은 인상적이다.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음악을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이 위협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음악은 보편적이며 신의 선하심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므로 가르치고 사용돼야 한다.”

한 마디로, 루터의 교회 음악은 ’경건성‘과 ’보편성‘이 균형 있게 담지된, ’하나님 중심적‘이면서 ’인간 중심적‘이었다.

이런 루터의 균형 잡힌 교회음악 이해는 그가 지나온 신앙 여정(旅程)과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소위 책상머리에서 나온 이론적인 결과물이 아니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 신앙‘에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치룬 숱한 영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확장된 인간 이해의 산물이다. 인간 이해의 확장이 그의 음악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오늘 교회 음악의 지나친 ’엄격주의‘도 인간 이해의 지평이 넓어질 때 벗을 수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인간 이해, 감정, 음악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논했다. 결론은 ’보편성‘이 제거된 기독교 신앙은 기형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성‘은 어디까지나 ’형태의 유사성(similarity of shape)‘일 뿐, ’본질과 속성의 그것‘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일치를 위함이 아닌 ’다름 속에서 유사성‘, ’유사성속에서 다름‘을 찾아내어, 인간에 대한 ’인식의 확장(expansion of cognition)‘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보편성‘과는 뿌리가 전혀 다르며, 우려하는 바처럼 그것으로 인해 종교다원주의에로의 길을 터주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 전인적이고 포괄적으로 반응하여 풍성한 삶을 구가하게하고, 복음 전파에 보다 효율적으로 임하게 해 준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