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공부 이유? 하나님 더 잘 알기 위함
초대교회, 성직에 요구 훈련 별도로 없어
전문화하다, 전공 외 분야 전문성 떨어져

신학 교육의 역사
신학 교육의 역사

후스토 곤잘레스 | 김태형 역 | 부흥과개혁사 | 243쪽 | 13,000원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함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높여드리기 위함이다. 이러한 신학 공부의 동기는 평신도나 목회자 또는 목회 지원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 공부’의 목적이 과거를 거울 삼아 오늘의 삶을 변혁해내기 위한 것이라면, <신학 교육의 역사>야말로 그러한 목적을 제대로 구현해내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번역된 같은 저자의 책 <일요일의 역사>처럼, <신학 교육의 역사>도 방대한 2천년 기독교 역사 중 (신학 자체가 아닌) ‘신학 교육의 변천사’에 집중해 그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책 말미에 두 장을 할애해 ‘신학 교육의 역사로부터 배우는 신학 교육의 미래 전망’, ‘현대 신학 교육의 다차원적 위기 진단과 해결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책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는 ‘2천년 신학 교육의 역사’도 흥미롭지만, 저자의 전망과 처방도 그만큼 충실하고 통찰력이 있어, 오늘 우리에게 적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이해했던 바 신학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저자의 진단에 따른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오늘날 우리가 구분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전반적인 신학 교육과 목회자 양성을 위한 훈련이 서로 구별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세례를 받기 위한 교육이 철저했기에, 성직에 요구되는 훈련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세례 청원자들이 밀려들어 교리 교육을 책임질 교사 확보가 힘들어졌고, 교육 과정이 마치기도 전에 세례식이 이뤄졌다. 로마를 정복한 게르만족의 기독교 개종도 빠르게 진행되면서 ‘세례후보자 교리 교육’은 점점 사라지거나 최소한의 과정으로 축소됐다.

중세의 모든 위대한 교사들이 품은 비전도 신학자들의 저작을 강독하는 자들의 어떤 필요에서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학자들의 사랑에서 탄생되는 신학에 관한 것이었다. 신학은 묵상(contemplation)에 가까웠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전심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의 지식적 격차는 더 벌어졌고, 사제들의 무지함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인쇄술의 발명은 이를 촉진시켰다. 이 무렵 정규 신학 교육 과정이 성직자들의 서품을 위한 필수 자격 조건으로 자리했다.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은 분야가 다양해졌고, 역사비평적 방법론은 신학 연구에 객관성·과학성을 요구했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갈등했고, 양극화됐다.

그리고 엄청난 전문화가 이뤄져,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 다른 신학 분야에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했다. 성경은 알지만 설교는 못 하거나, 목회상담은 하지만 교육에는 자신이 없는 신학생들이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목회 사역에서 이전의 특권적 지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었다. 목회자들은 ‘성경과 신학 외 분야’에 무지한 것을 마치 신성한 것처럼 경전화하고 정당화시켰다.

이는 소위 ‘성경 제국주의(Biblical Imperialism)’를 불러왔다. 자신이 ‘성경 전문가’라는 이유로, 과학 등 각 분야에까지 참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제국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는 그들과 거의 관련 없는 것처럼 해석되고, 복음이 현실에서 설 자리를 점차 잃게 했다.

커리큘럼은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됐다. 대부분의 신학 교육 과정은 졸업을 위해 이수해야 하는 일련의 과목이 됐고, 목회 후보자의 전인적 형성이라는 취지는 밀려났다.

칼빈 제네바
▲칼빈이 아카데미를 운영했던 제네바의 모습. ⓒ크투 DB
이러한 상황이기에, 저자는 신학 공부와 목회자 양성에 대한 총체적 방향 전환과 그 개념에 대한 재정의를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평신도의 사역 참여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위해, 암브로시우스처럼 이미 사역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 향상을 위해 신학 공부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지향점으로는 △신학 교육을 교회의 중심부로 되돌리고 △배우는 내용 자체보다 배움의 내용과 과정을 모두 공유하고 가르칠 수 있는 역량 개발에 더 중점을 두는 교수법과 수업 평가 방식을 발전시키며 △신학 교육을 삶 전체에서 일생 동안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으로 전환시키며 △변화하는 환경과 예상 못한 도전에 교회 전체가 대응할 수 있는 교육 체계를 발전시키고 △멘토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며 △이 모든 것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신학적 연구와 반성의 자료를 생산해 내도록 독려해야 한다는 등을 제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교회 개혁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환영하든 거부하든, 그 미래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과제는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약속하시는 개혁을 우리가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일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다.”

신학 교육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①신학 교육이 반드시 하나의 연속체가 돼야 함을 숙지한다 ②이론이 실천에 선행하는 신학 교육 형태에 도전, 실천-반성-실천의 순환적 모델을 위한 여지를 마련한다 ③엘리트주의에서 반드시 벗어난다 ④신학 공부와 목사 안수 사이의 관계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⑤기숙사 바깥 학생들과 파트타임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날 것임을 인식한다 ⑥이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인정한다 ⑦교단 산하 신학교들은 교파적·교단적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⑧현재 신학 교육의 제도적 장치와 교회의 전반적 삶에서 아직 문화적 속박이 잔재해 있음을 인정한다 등을 꼽았다.

“최고의 신학 공부는 목사 안수를 위한 자격 요건을 채우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런 열망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학 교육의 개혁>과 함께 읽으면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원제 ‘The History of Theological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