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
▲‘꼬마 목사’ 류한승 목사를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 ⓒ교회 제공
1. 말과 글 모두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방식이지만, 둘의 다른 점이 있다면 글은 눈에 띄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쓸 때는 보다 진중해지기 마련입니다. 말은 던진다는 표현도 있지만, 글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말과 글, 어떤 것을 신중히 해야할까요?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둘 다 신중해야 합니다.

2. 말은 글보다 앞선 의사표현 방식입니다.

모든 의사표현은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감정으로 전달됩니다. 반면 글은 바로 이런 흩어지는 말의 지성적인 정보들을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말을 하면 반드시 그 말로 인해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말은 눈에 띄는 곳에서는 사라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판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그 사람과 먹었던 음식은 보이는 형태로 먹고 저장되고 배출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때 감정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오랫동안 저장되듯, 말은 사라지는 듯 하지만 각자 감정으로 오랫동안 남습니다.

그리고 말을 청취한 자는 자신이 저장해두고 있던 여러 정보를 혼합하여 말을 타인에게 재해석 후 인출합니다.

3. 따라서 말을 한 사람의 의도와 정보가 제대로 타인에게 전달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같은 본문으로 아무리 오랫동안 준비한 설교도 듣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줄이면 줄일수록 실수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감정적인 말에 있어서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4. 하지만 글도 신중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모든 글은 보이는 자취로 남기 마련입니다. 자취를 남긴다는 것은, 글 하나 하나에 자기 자신이 담긴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글에는 자신이 상상하는 무한함이 담깁니다.

그러니 글에는 사람 냄새가 나야 합니다. 감성이 사라진 정보로 이루어진 글은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5. 요즘은 글의 홍수 시대인듯 합니다. 말도 많지만 글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글과 말이 분리된 듯 합니다. 글에 자기 냄새가 아닌, 타인의 냄새가 납니다.

저도 글을 쓰기가 참 힘들 때가 많습니다. 글을 본래 못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고민은 제가 담기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된 글쓰기 교육이 참 걱정됩니다. 글쓰기를 베끼는 훈련부터 시키는 겁니다. 대학 논술 전형에 대비한 학원들은 글쓰기의 자세와 방법이 아니라, 글쓰기를 하는 당사자와 글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니 지적으로 채워주는 글은 남지만, 기억에 남는 글들은 금세 사라집니다. 글에 자기가 남는다는 것의 두려움을 모르나 봅니다.

6. 좋은 글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글이 사람이니까, 글에 사랑이 없으면 말만 못합니다. 말은 감정을 깨우고, 글은 지성을 깨웁니다. 하지만 좋은 말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말이어서 생각해야 하고, 좋은 글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글이여서 사랑이 담겨야 합니다.

왜냐면 본래 말과 글은 하나여야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말이 글이 된 시대입니다. 영상, 음성으로 이루어진 미디어 시대는 말의 중요성이 뼈저립니다. 이제는 말도 자취가 남습니다. 그래서 말에도 글이 있어야 합니다.

7.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글이 행동과 이어지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은 언행일치가 되야한다고 하는데, 언행일치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렇게 말로 핑계를 댑니다.

“세상에서 사니 어쩔 수 없다”고. “세상을 닮아가는건 당연하다”고.

그래서 우리에게 요한복음 21장 디베랴 호수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복음서,
예수님의 행적을 다룬 마지막 책의 마지막 장.

그 글에는 어떤 사랑이 담겨 있을까.

8. 디베랴와 갈릴리는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장소를 굳이 혼자서만 디베랴라고 글로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과 사물을 지칭함에 있어, 본래 쓰던 용어가 있음에도 다른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곳에는 작가의 생각이 담긴 것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요한이 쓴 책이고, 성경은 저자를 기자라고 표현하므로 원래 스피커(Speaker)의 생각이 담긴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하심을 글로 기록한 책, 그런데 그 말과 글에 담긴 건 사랑. 예수님 냄새가 나는 글입니다.

9. 갈릴리 바다는 순수하고 작은 촌락으로 이루어진 작은 바다입니다.

예수님이 11명의 제자들을 이곳에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부르실 때 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셨지요.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에게는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 사역의 시작이고, 마지막인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사역의 중심을 이곳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은 제자들의 가정이고 일터였던 것입니다. 다른 곳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한 곳. 하지만 그곳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셨던 곳입니다.

10. 왜 이곳을 디베랴라고 기록했을까요. 어떤 변화가 이 작은 장소에 있던 것일까요.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해발 200m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예루살렘 유대식 건축이 아닌, 로마식 건축으로 궁을 세웁니다.

궁이 들어서니 주변이 변화한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궁 전면을 금으로 만들고, 그 궁전을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바칩니다.

황제의 궁이 되었으니, 이 디베랴 바다는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촌락이 갑자기 황제의 도시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와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덧 갈릴리 촌락이 아닌 황금빛 나는 지역, 소소한 낚시가 아닌 황금 중심의 지역, 예수님 중심이 아닌, 황제 중심의 도시로 변하는 바로 그 시점….

요한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11.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시작을 이렇게 글로 표현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저는 이 짧은 한 구절 가운데, ‘그 후에’와 ‘또’라는 단어가 너무 좋습니다.

부활하시고 의심많은 도마를 바로 세우시고 나서,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 나서도, 여전히 두려움 많아 문 걸어잠근 사람들 가운데 또 나타나시고 나서도,

또…, 여전히 나타나신 예수님.

황제의 논리로, 전혀 예수님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는 디베랴 한복판에 예수님은 여전히 또 나타나셨습니다.

‘여전히’. ‘또’.

참 흔하디 흔한, 말만 들어도 질리는.

여전히. 그리고 또.

의미 없어 보이는 두 단어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자기 자신에 실망하고 있지는 않나요?

코로나19가 이제 끝나가나 싶었지만 여전히, 또 다시 돌아간 세상의 풍경에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교회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시는 여러분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여전히 저희 교회는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학교 개학 일정이 또 변했지만, 당연히 또 학교 개학 일정에 맞춰 고통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절대로 소망없어 보이는 ‘여전한’ 세상, ‘또’ 반복되는 일상과 아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주변이 어떻게 변화했든, 아무리 세상의 논리가 앞서고 변화되지 않는 듯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여전히 우리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난 세상 문제를 통해, 그 은혜와 사랑을 나누려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사랑을 담아보려 합니다. 제 사랑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아무쪼록. 걱정인 것은 여러분의 일상입니다. 그곳이 디베랴일 테니까요. 갈릴리가 사라진 디베랴.

하지만, 여전한 예수님 사랑이 또 다시 채워지는 일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디베랴건, 갈릴리건,
그곳이 서울이건, 뉴질랜드건, 애틀란타건, 중국이건 유타건, 대구건,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열심히 일하느라 지치고 곤한 그곳, 그곳의 지배자가 누구이건,

소망없는 곳에 ‘여전히’ 찾아가 주시는 분은 ‘또’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믿고 또 다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