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구원의 확신’이란 사변적 추론(speculative reasoning)을 거친 인식의 결정체도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에 의존된 어떤 ‘자신감’ 같은 것도 아니다.

율법 앞에서의 자기 절망, 은혜에의 신뢰, 성령의 역사 등 영적·심리적 인과관계 속에서 함께 버무러진 신령한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확신’을 동일시했다가, 또 어떤 곳에선 차별을 두기도 한다.

◈자기 신뢰가 완전히 사라진 자에게만 가능한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은 이론적으론 ‘뭔가’ 있는 실력자가 갖는 어떤 것 같으나, 사실은 자기에겐 ‘구원에 기여할 것이 전무하다’는 것을 자각한 자가 갖는 은혜이다. 이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패러독스(paradox)이다.

다리가 많이 불편한 사람에게 10km를 가라고 하면, 갈 확신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가 마비된 자에게 10km를 가라고 했다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힘이 아닌 전동휠체어를 타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있어 인간 자신의 힘을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한, ‘구원의 확신’은 요원하다. 이는 ‘자신의 힘’이 ‘구원의 성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전적 무능자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갖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불확실한 인간의 힘이 조금이라도 개입될 때, 구원은 실패하고 그것에 기반한 ‘구원의 확신’ 도 불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생생한 예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풍병자이다.

천사가 물을 동(動)할 때 먼저 들어가면 치유를 얻을 수 있는 연못을 지척(咫尺)에 두고서도 그는 38년 동안 연못에 들어가지 못해 치유를 못 받았다(요 5:5-7).

물론 이 ‘베데스다 연못’ 은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얘기 같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있다. 단 한줌이라도 불확실한 인간능력에 의존된 구원은 ‘성공의 보장’도 ‘구원의 확신’도 견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자기 절망의 자각’과 ‘구원의 확신’은 ‘자아 성찰’과 ‘인간의 한계적 상황’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형성된 심리적 결과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 앞에서의 절망’ 과 ‘그리스도 신앙’으로 된 것이다(갈 3:24).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구절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말씀 역시, ‘믿음’으로 이끄는 소스(sauce)가 ‘율법 앞에서의 절망’과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선 ‘율법 앞에서의 절망’이 생략됐지만 언제나 그것이 전제된다. 이는 ‘믿음’이란 언제나 율법의 정죄아래 있는 ‘절체절명의 죄인을 건져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율법의 정죄’ 아래서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불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함으로서(갈 3:13)’ 구주가 되셨다.

그리고 이 ‘구원의 확신’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와 결부된다. ‘믿음’이 수납될 때 ‘믿음의 영, 성령’이 부어져 ‘구원의 확신’을 더한다. ‘그리스도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성령’이고(고전 12:3), 믿을 때에 성령이 부어진다(요 7:39). ‘믿음’과 ‘성령‘의 상호교호(interactiveness, 相互交互)적인 역할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가능성에 기반한 율법적 신앙에는 ’성령의 부어짐‘도 ‘구원의 확신’도 없다. ’구원의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율법적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구원의 확신은 자만심과 나태함을 낳는가?

‘구원의 확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갖다주는 안일함이 성도들에게서 열심, 간절함을 탈취해 감으로 그들을 방종, 나태함에 빠뜨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은 경건한 신앙에 방해물이 되며, 너무 많이 ‘구원의 확신’을 말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 중에서도 ‘구원의 확신은 사탄적 이다’라고까지 한 로마 가톨릭은 그것에 대한 폄하의 극치이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5)”,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 신앙의 열심을 죽인다’고 추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기반한 ‘자신감’과는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된 ‘겸비함’을 그 속성으로 하기에, ‘자만심(自滿心)’과 ‘안일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자기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됐다’는 인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부채질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를 향해 갈망을 일으키도록 하는 그의 긍휼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긍휼을 바라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

‘확신’과 ‘간절함’의 변증법적 관계 역시 둘을 적대적으로 놓지 않지 않게 한다. 곧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안도감이 ‘구원에의 갈망’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신뢰를 바탕한 ‘자신감’에서 오는 ‘구원의 확신’이 갈망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구원의 ‘현재완료적’ 시제 역시 ‘확신’으로 말미암은 ‘자만심’을 허락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이 과거 어느 시점에 종료됐다는 ‘과거완료형’ 시제와는 달리, 현재까지를 포괄한다.

이런 포괄적인 개념은 ‘구원의 확신’을 구원을 과거에 종료된 일이 아닌 현재적인 일로 간주하게 하고, 구원에 대한 현재적 관심을 촉구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thy faith hath saved thee, 눅 18:42)“,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요 5:24)”.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은 과학자들의 실증적 추론이나 수사학자(修辭學者)들의 논리적인 유추로 말미암은 ‘인식론적인 확신’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일단 확증되면 그것에 대한 관심은 정지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정반대로, 비로소 ‘구원에의 관심’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영계가 열리고,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들과 함께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으로 막 열리기 시작한 구원의 세계가 어찌 금방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될 수 있겠는가? 이 원리는 팔복의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가 아닌, 이미 ‘의에 배부른 자’이다.

‘의(義)에 배부른 자’는 그 배부름에 도취되어 더 이상 ‘의’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의에 주리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未曾有)의 ‘의(義)’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계속 ‘의’를 갈망하도록 만든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종료’ 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구원 개념을 쫓은 것이 아닌, 순전히 사변적 추론이다. ‘구원의 완성’으로 비로소 구원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구속의 도리를 알려주시고, 아버지와 아들을 계시해 주어 영적 생기가 충천하니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없다.

만일 ‘구원의 확신’이 신앙을 정체시키고 자만에 빠지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완성인 동시에 시작이고, 시작인 동시에 완성이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