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인간이 ‘자신을 보는 법’과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법’이 전혀 다르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관찰법이 옳다. 인간의 시각은 죄로 왜곡됐기 때문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 시각의 왜곡을 이렇게 표현한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졌고(엡 4:18)”,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구원이 갖다 준 첫 변화를 ‘시각의 정상화’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다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세 가지 관심법(觀心法)’이다.

◈죄인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완전을 보시는 하나님

비록 금생에서 성도의 삶이 불완전하고 약점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하게 보신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본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된 성도를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공유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한다(엡 1:4)”는 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성도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모든 지위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를 충분히 수납하지 못하므로, 자신들을 불완전한 채 남겨두는 이들이 있다. 이런 그들의 불완전한 자화상(自畵像)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며, 영적 축복들을 놓치게 한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보자기에 싸인 부정한 짐승들을(이방인을 상징) 잡아먹으라(행 10:13)는 주님의 명령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 10:14)”라고 거부했다.

이땐 아직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 유대인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깨끗하다(행 10:10-29)’는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러지 않은 척 외식(外飾)을 한 것은(갈 2:12-13), 그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을 수납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는 그 때의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지 않다.

동시에 어떤 사람이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동시대인들로부터 최고의 경건인으로 추앙받던 바리새인들(the Pharisees)이 그들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독사의 자식(마 3:7), 회칠한 무덤(마 23:27), 외식자(마 23:25)로 독설했다.

이러한 엇갈린 평가는 개인의 경건성에 대한 판단에서라기보다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그리스도 밖에 있느냐’에 의해 결정됐다.

사람이 보기엔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더러운 자이고, 사람보기에 부정해보여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깨끗한 자이다.

색안경을 끼면 사물이 온통 그 색으로 보이듯,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완전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은 미래지향적 ‘점진적 완전’이 아닌,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와 연합’되어 그의 완전을 공유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산되지 않는 한 그의 완전도 무산되지 않는다.

◈맨몸(裸身)이 아닌 옷 입은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죄사함 받은 성도를 보실 때, ‘의(義)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지, 죄된 벌거벗은 맨몸(裸身)을 보는 법이 없다. 성경이 ‘죄의 용서’를 ‘죄를 가려줌’으로 표현한 것은(롬 4:7) ‘의의 옷’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칭의’는 종종 ‘옷 입는 것’로 묘사됐다.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義)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주의 제사장들은 의(義)를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찌어다(시 132:9)”.

사람이 옷을 입으면 맨몸(裸身)이 가려지듯, 죄인이 ‘의(義)의 옷’를 입으면 그의 맨몸 곧, ‘죄의 수치’가 다 가리어진다. 그리고 그 ‘의의 옷’은 영원한 옷이며(시 119:142), 다시 벗을 일이 없다. 따라서 그의 수치가 다시 드러날 일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맨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화가들이 인물화를 그릴 때도 옷 입은 모습을 그리지 맨몸(裸身)을 그리지 않는다. 사람은 그가 입은 옷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의 정체성도 그의 개성도 드러날 수 없다. 걸인이니 노숙자니 부자니 상류층이니 하는 것도 그들이 입은 옷 때문이다.

아무리 고상하고 지체 높은 자라도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으면 그냥 노숙자가 된다. 반대로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훌륭한 의상을 걸치면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역시 그가 입은 옷에서 결정된다. 그가 입은 ‘의의 옷’은‘죄사함을 받은 하나님 자녀’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듯, 죄로 벌거벗은 우리에게 영원한‘의의 옷’을 입혀주셨다(시 119:142, 갈 3:27).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인정하지 않고, 기어코 옷 아래 숨겨진 자신의 수치스런 맨몸(裸身)만을 주목한다면 이는 ‘자기 정체성’을 부정한 것일 뿐더러, 그의 의(義)가 되어 준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아무리 결점이 없어 보이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졌더라도(자연인의 완점함을 구비했더라도), ‘의의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벌거벗은 죄인은 그 자체로 부끄러움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맨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입은 ‘의의 옷’에 의해 결정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성경은 ‘사람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삼상 16:7)’고 가르친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과 결부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접근하지 않으면 단지 상투적인 이해에 머물게 된다. 두 가지 점에서다.

하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 뒤에 감춰진 동기까지 보신다’는 판에 박힌 이해이다. 이런 판에 박힌 이해는 곧장 ‘그리스도인은 토마토같이 겉과 속이 일치된 자여야 한다’는 윤리적인 교훈으로 귀결되고, 소위 ‘코람데오(Coram Deo)’가 강조된다.

그러면서 반면교사로 등장되는 이들이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의 상징처럼 여겨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외식자’라고 독설한 것은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비윤리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義)’로 ‘하나님의 의’를 대신한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의미가 겨우 ‘인간의 표리부동’을 식별해 내는 정도라면, 그것은 꼭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독심술(讀心術)이라는 것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이다.

예전 사극에 등장한 궁예(弓裔)의 관심법(觀心法)도 일종의 독심술이다. 술사(術士), 무당(巫堂)의 예지력(睿志力). ‘인간의 행동과 심리’관계를 정리한 ‘행동심리학’이나 ‘인간의 심리와 생체반응’의 관계를 적용한 ‘거짓말 탐지기’ 같은 것도 어느 정도 대치가능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에 대한 또 하나의 상투적 이해는 ‘성심을 다한 치성은 하나님이 반드시 알아주신다(至誠之感天)’는 보편적 종교원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종교의 원리가 초월적인 3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적용되고 있음은 놀랍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상 통용돼 왔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하나님 이해 역시 이런 자연종교의 경건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충성은 ‘순수(?)하고 진지한 경건이기만 하면 하나님이 감읍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도였을 때, 율법에 흠이 없었을 정도로(빌 3:6) 율법에 충성을 바쳤던 것도 같은 범주에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적 치성(致誠)을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치성과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했고(롬 9:31)”“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롬 10:2)”는 말씀에서 확증된다.

아무리 ‘진심과 성의’를 다 해도 ‘그리스도 밖’에서 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치성(至誠)’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란 자연인의 ‘진정성, 치성, 표리일치’같은 것이 아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믿음의 일’뿐이다.

이런 ‘중심을 보는 안목’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讀心術士)’든 ‘행동 심리학자’든, 예지력(睿志力)을 가진 ‘술사(術士) 무당(巫堂)이든, 인간에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

오늘 우리에겐 하나님만이 보실 수 있는 ‘중심’이 있는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