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6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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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主客顚倒)

오늘날 여성들의 전용품들 가운데 양산과 하이힐이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양산을 쓰고 하이힐을 신고 다니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원래 양산과 하이힐은 오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16-19세기 사이 유럽의 위생 상태는 더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은 평생 동안 딱 두 번, 즉 태어날 때와 결혼 전날에만 목욕을 했다고 자랑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목욕하면 페스트에 잘 걸린다는 속설을 신봉해서 목욕을 기피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화장실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일반 가정집에는 물론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화장실이 없었다니 상상이 가십니까? 화장실이 없었다면 용변을 어떻게 처리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집안에서 용변을 보고는 그것을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렇게 창문을 통해서 머리 위에 떨어지는 용변을 막기 위한 도구가 양산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용변을 밟더라도 낭패를 피해 갈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 하이힐이었습니다. 또한 화장품과 향수도 목욕을 하지 않아 생기는 지독한 냄새를 희석시키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주객전도’라는 것은 손님이 도리어 주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손님은 손님이고 주인은 주인인데 그것이 뒤 바꿨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인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청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결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그것을 감추고 피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가끔씩 쇼핑을 하다 보면, 사은품 때문에 본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 상품에는 관심이 없고, 사은품 때문에 물건을 삽니다. 나중에는 후회를 합니다. 사은품으로 주는 물건들은 대부분 상품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또 사은품 때문에 본 상품을 구입한 것이기에, 본 상품도 별로 사용을 하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비단 이런 주객이 전도된 삶은 물건을 사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가운데 종종 나타납니다.

본질이 중요하다

사람들 가운데는 본질을 잃어버린 채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달이 본질이고,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은 비본질입니다. 그런데 본질인 달을 쳐다보지도 않고, 비본질인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에 목을 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행복하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 취직을 하고 장사를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법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욕심이 그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행복한 삶은 어디 가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교도소가 된 학교

《태백산맥》의 저자인 소설가 조정래 씨가 교육에 관한 장편 소설을 썼습니다. 제목이 《풀꽃도 꽃이다》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을 걱정하며 쓴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도 참 많이 아팠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 명단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물론 이 글은 조정래 씨가 직접 쓴 글은 아닙니다. 인용해서 소설에 옮긴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 생활이 얼마나 힘들면 교도소에 빗대어 학교생활을 글로 적어 놓았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교가 본질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적보다 인간의 가치를 소중여기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직 대학입시에만 초점을 맞추고 교육을 하다 보니 학교생활 자체가 교도소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육 방식

노벨경제학상의 65%, 노벨의학상의 25%, 노벨물리학상의 22%, 노벨화학상의 12%, 노벨문학상의 8%를 수상한 민족이 있습니다. 겨우 인구는 1,300만명, 전 세계 인구의 0.2% 정도밖에 안되는 이 민족은 미국 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최상위 부자들 가운데 1/4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민족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은 수많은 박해와 대말살을 당하고, 심지어 나라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민족성을 잃지 않고 나라를 새롭게 세우고 세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의 교육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부모들의 교육방식에 대해 잘 요약한 글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라는 말을 하지 마라.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 엉뚱한 꿈이나 기대를 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라고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서 잘하라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꿈은 아이의 행복과 관계가 있으므로 어른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부든 뭐든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하지 않는다. 즉 어떻게든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저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라’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만약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후회 없이 노력하라고 조언해줄 뿐이다. 이처럼 아이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 마음대로 뭔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대인 부모들의 교육 방식이다.”

물고기를 잡아서 살을 발라 먹여주는 우리나라 부모들과 교육 방식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결국 유대인들은 교육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고, 그 힘이 뛰어난 인재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라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비본질적인 것이 치중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소래교회는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서상륜이 자신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최초로 한국인 스스로 세운 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황해노회는 소래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교회를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증축된 소래교회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 교회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소래 교회는 기역자(ㄱ) 교회입니다. 유교문화가 강했던 그 당시 우리나라였기 때문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해서 남녀가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가운데 커튼을 치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았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는 다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의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때도 방석파와 의자파가 나누어져 논쟁을 펼쳤습니다. 그 이후 장의자에서 또 편안한 의자로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기타를 친다든가 드럼을 친다는 것이 초창기 교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수적 교회에서는 기타를 치는 청년들을 사단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시대를 담는 그릇은 바뀌어야 합니다. 옛 것만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에 맞는 형태로 예배도 찬양도 전도도 여러 가지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도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본질을 놓치면 그 가운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을 놓쳐버린 사도들

초대 교회는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하는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는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 갔습니다.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일이었고, 심지어 죽을 각오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성도의 수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자 초대교회 가운데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

여기서 ‘히브리파 사람’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본토박이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헬라파 유대인’이란 각처에서 흩어져 살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 출신의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곧 다른 나라에서 살다 다시 본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사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외국에 나가 살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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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이 당시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철저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과부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로부터 구제를 받지 못하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구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이며 과부인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빠지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 구제하는 일은 주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이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헬라파 유대인 출신의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진단했습니다. 자신들이 본질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본질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사도들은 비본질적 일에 치중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도들이 봉사하고 구제하는 일에 신경을 쓴 것입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 가운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사도들은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워, 성도들을 돌보고 봉사하고 구제하는 모든 일들을 맡기게 됩니다. 사도들은 다시 본질을 붙잡았고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가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질을 놓치면 우리 삶이 껍데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대들보와 같습니다. 대들보는 한옥집에서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들을 이어주는 대를 의미합니다. 이 대들보가 없으면 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대들보는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질을 놓쳐버리면서 우리의 삶은 껍데기가 되고 한 순간이 우리의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님 앞에서 선 사람들이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대체 알지 못하겠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했다고 말하는데 왜 주님은 이들을 불법을 행한 자로 하시면서 떠나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들은 한 마디로 주님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결국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속에 본질 되는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 땅 가운데 살았던 삶은 주님을 믿는 척 했던 껍데기의 삶에 불과했습니다. 그 실체가 주님 앞에 가니까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도들도 본질을 놓치니 실제로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껍데기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으니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삶 가운데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셨습니다. 핏값으로 사셨기에, 핏값의 가치를 해야 합니다. 핏값을 가치를 하는 삶이 바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목적,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본질을 붙잡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비본질을 붙잡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를 ‘자기 PR 시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피알(PR)’을 어떤 분은 ‘피가나도록 알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려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쓰임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피알해야 하지만, 주님을 피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을 통해 내가 드러나고, 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본질을 붙잡고 살면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사도들이 본질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 제자의 수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입니다.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모릅니다. 사도들이 본질을 붙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니,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본질을 붙잡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

우리가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처음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목사로서 해야 할 본질을 망각하거나 나태해지려 할 때 떠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나님 앞에서 가서 기도하면서 우는 장면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면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그 때 제가 주님의 종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난 다음, 눈물을 흘리며 매일 같이 기도했던 내용이 이렇습니다. ‘주님 공부도 못하는 것이 주의 종이 된다고 갑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장면을 떠올리면 나태했던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힘들지만 목사로서의 본질에 충실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마음 먹게 됩니다. 처음 마음을 가지니 다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으로 빠진 목사님들이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분들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버렸습니다. 주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아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처음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리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을 쫓아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잘 잊어버립니다. 주일예배뿐 아니라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까지 나오시는 분들은 제 설교를 일주일에 10편 이상씩 듣는 분들이십니다. 그 말씀만 다 기억해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꼭꼭 새기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계속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을 계속 되뇌이면서 기억하려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본질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신 목적,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본질에 얽매어 살아가는 잘못된 것들을 깨뜨리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신 목적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비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비본질적은 것은 다 양보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