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 하니라(출 13:21-22)”.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 이니라(벧전 3:4)”.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 백성을 이끌어 내시어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분으로 지금도 백성들 앞에서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들을 곧장 시내산으로 인도하는 대신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위대함을 천하 만민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4절 말씀 가운데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려고 하는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개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 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삼상 12;3)”.

사무엘은 자신의 통치권을 사울에게 이양하는 의미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주 요점은 비록 왕정 체제를 갖춘다 할지라도, 왕은 이방 민족의 침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사 시대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고별 설교로서, 왕을 세우는 일에 다소 섭섭함이 깔려 있음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위 제목 ‘코람데오(Coram Deo)’는 무슨 뜻일까요? 현재 부산에 있는 어느 대학교 정문에 ‘코람데오’라고 새겨진 학교 교훈이 십자가 모양 돌 비석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코람데오’는 라틴어 ‘코람(Coram)’이 앞에서, ‘데오(Deo)’가 하나님을 뜻합니다. 두 단어를 합쳐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는 ‘코람데오’의 겸손한 정신이 마음 밭 깊은 곳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에서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이란, 죄의식과 정의의식, 성화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코람 데오’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삶인 것입니다.

필자가 ‘코람데오’에 대해 칼럼을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총선 다음 날인 4월 16일 밤 10시 경 받은 문자 메시지가 너무 황당했기 때문입니다. 문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OOO 장로님으로 마지막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뵙겠습니다. 코람데오~.’

이 문자를 보고 한참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분은 필자와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안수집사님인데, 평소에도 성품이 온화하시고 지적으로나 인품으로나 비록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자를 보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아! 이 분이 어디 몸이 좋지 않아 중병으로 혹 시한부 삶을 살고 계시는 것 아닌가’ 싶어, 병문안을 가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문자를 확인한 후 여러 사람에게 문의를 해본 결과,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은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문자를 왜 보냈을까 하는 의구심이 필자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이유인즉 그 분은 교회 장로 피택을 준비하는 분인데, 아마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 장로 피택에 있어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런 문자를 보내온 것 같았습니다. 3년 전 그 교회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해 성도들 400-500명이 떠나간 적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분열하는데 원인을 제공했던 장로들이, 떠나간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자신들이 저지른 추악한 민낯을 감추기 위해, 그 사람들과 문자나 카톡으로 연락을 하면 피택 과정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자, 불안한 나머지 눈치에 못 이겨 문자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안수집사님인데 신앙생활 하면서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향후 교회 일을 치리하는데 있어 많은 불법들이 활개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거듭되는 악행 가운데, 무슨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지요. 가슴이 먹먹합니다.

거기다 마지막 ‘코람데오’라는 문자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인 장로와 목사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일전에 약 200명이 떠나갔고, 그 후 400-500명의 성도들이 떠나갔음에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과 한 마디 없습니다.

오히려 몇십 년간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할 수 없이 교회를 떠나거나 쫓겨난 성도들을 ’나쁜 사람들’로 매도하고,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떠나간 사람들을 절대 만나지 말고 상대도 하지 말라고 엄포까지 내리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 동원하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교회 안의 항존직 선출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함에도, 이를 어기고 마치 브라이도리온 뜰의 대제사장처럼 주님을 또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내치려 하고 있으니, 가슴 치며 회개할 뿐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헌법 제2편정치 제5장, 6장에 기재되어 있는 목사, 장로의 자격과 직무 그리고 선택을 법에 따라 엄격하게 존중해야 함에도, 교회 안에서는 부적절한 행동과 언어, 그리고 밀실 거래를 비롯한 직분 장사를 하는 죄악의 모습들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회초리를 들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다른 교단들도 목사, 장로를 피택하는 방법은 헌법상 거의 비슷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장로고시 과정에서도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적절한 광경들을 필자 역시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찌 저렇게 위선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싶어 심히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저런 분들이 장로가 되어 기독교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태연하게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도 못하고, 성도들 앞에서 버젓이 믿음 좋은 신앙인으로 크게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개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 크나큰 방해꾼으로 활개치고 있는 오늘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이토록 부패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과 직무는 총회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적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을 속이고 고함지르고 욕하며 걸핏하면 싸우고 갑질하는 사람들이 장로와 안수집사로 선출되는 기이한 현상은, 비신앙인들 보기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정말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그 날이 머지 않았음을 말하는 듯 합니다.

장로라면 어느 정도의 인격과 품성을 고루 갖추고, 가슴이 따뜻하며 온화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 말씀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여야 합니다.

장로를 뽑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수 있는 집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안중에도 없고, 오롯이 그들의 권력에만 집착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는 지금도 교회를 향해 나지막하게 들려줍니다. ‘코람데오’….

노회나 총회에서도 ‘장로의 선출’에 대해 오래 전에 법으로 제정했던 것들을 시대 변천에 따라 어느 정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앙인들도 이에 동의하리라 확신합니다. 노회 총대나 총회 총대 선발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교회의 덩치가 크고 교인 수가 많으면 거기에 따라 총대 인원 수를 배정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심각한 시행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교회는 총대 2인, 작은 교회는 총대 1인으로 하여, 큰 교회는 작은 교회에 대해, 작은 교회는 큰 교회에 대해 부적절한 행동이나 논의를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총회에 참석하는 장로들도 한 번 참석했으면 연속으로 참석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총회에 참석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구습들에 대해 좋은 안건을 제시하고 새로운 법안을 제안해서 기독교 발전에 이바지해야 함에도, 말 한 마디 못하면서 총회 참석은 부리나케 하는 장로들도 있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종으로서, 세상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엄정하고 투명하며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주님의 제자들을 선택하여, 오직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여, 이 땅에서 신앙인들을 위한 복음의 전진기지를 세우는데 앞장서는 주의 종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코람데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