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스캇 솔즈 | 정성묵 역 | 두란노 | 332쪽 | 18,000원

여호수아 5장 13-15절에는 여리고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가 한 사람을 만난 사건을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고 묻는다.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로서는 이러한 질문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말한다. 누구를 위하느냐란 여호수아의 질문에, 자신은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고 말한다.

여리고와의 전쟁을 곧 치르게 될 여호수아에 대한 답변은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끄심에 의해 지금 여리고를 정복하러 가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셨음에도, 여호수아 편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하려고 나아가지만,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 말씀대로’란 말을 많이 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내편과 적을 구분하곤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지만, 그 하나님마저 나의 편이고 나에게 종속시킬 때가 많다.

얼마 전 끝난 총선에서도 어떤 이들은 ‘기독’이란 이름을 당 이름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며 성경적 기준이라는 이름 하에 공약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의 야심과 목표에 의해 한 이들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나름의 신앙적 순수함으로 그렇게 행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행위가 모두 옳다 그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할 것이다. 혹시 우리는 여호수아가 질문했듯 질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여호수아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랐던 인물이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여호수아가 어떤 마음으로 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지를 재점검하게 하신다.

그러기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시며, 편가르기가 아닌 여호수아가 사명 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다시 돌아보게 하신다. 마치 모세가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이끄신다.

이번에 읽은 스캇 솔즈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를 읽으며, 이 구절이 생각난 것도 그런 연유다.

사람들은 자주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이라고 말하고, 그 선을 넘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중대하게 어긴 것이거나 악한 이들, 배도자 취급을 할 때가 많다.

물론 선을 긋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로들의 전통’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아마 이들은 상당 부분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마냥 그들의 기준을 절대시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에 모자라면 하나님의 말씀마저 불합격시킬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은 보수적인 기독교만이 아니라, 개혁이나 진보를 부르짖는 이들에게서도 나타나곤 한다. 이런 양 진영의 충돌 속에서 어느 한 진영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살거나 어느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면 진영 논리로 적이나 아군이냐 구분지어지곤 한다.

설혹 같은 아군으로 여겨지다가도 일부 의견이 다른 것을 알게 되면 곧 다시 쳐냄을 당하기도 한다.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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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소문의 벽>에는 6.25 전쟁 속에 아군과 적군의 점령이 쉴새 없이 바뀌는 지역에서 밤에 집에 쳐들어온 손전등 뒤의 존재가 ‘너는 누구편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답 한 마디에 생명이 달린 상황을 그린다.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한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어둠 속의 존재에 내 생명의 존폐가 결정된다.

종종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대통령에 대해, 코로나19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자유주의자나 꼴통보수로 규정되기도 하는 지금의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아마 이 말 한마디로 난 이미 누구의 편으로 규정되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목회자는 여러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계층을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이상 품고 기다려야 함에도, 말 한 마디로 더 이상의 목양이 힘들 때도 상당히 있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에는 민주화 투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를 살아가던 ‘소양’이라는 대학생 주인공을 다룬다. 그녀는 시대 현실로 고민하고 학생운동을 고민하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벼락부자가 된 철저하게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이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버지의 부의 우산 아래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속에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택할 수 없었고, 그 중간지대인 회색지대는 존재할 수 없었고, 어느 진영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만다.

당시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어느 시대보다 진영논리 속에 갇혀 사는 현 기독교인들은 지금의 현실이 만만하지 않다.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저자는 각각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 쟁점과 고민을 풀어간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저자의 각 주제에 대한 답변이 불충분해보이고 제대로 된 선긋기를 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책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생각보다 치열한 선긋기와 중재를 하지 않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만일 그런 느낌을 받는다면, 읽는 독자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선긋기를 행하고 있거나 혹 저자가 자기 선 안에 없다고 생각함으로 자기 편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저자가 선긋기를 하지 않는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실 중재자는 항상 외롭고 각 진영에서 배척되기 쉽다. 부부 상담을 해보라. 한쪽의 일방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남편과 아내 양쪽에서 불만의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자신이 아닌 상대편만 든다고 말을 듣기 십상이다. 교회 갈등을 해결할 때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유심히 읽다보면 저자가 자기가 고민하는 성경적 기준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선 긋는 독자들을 조심스럽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나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이 무엇이냐다. 우리는 선 긋기로 하나님을 제한시키거나, 하나님을 내 방식대로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총선이 끝났고 한바탕의 편 가르기가 끝났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또 다른 편 가르기가 시작될 것이다. 교회도 그럴 것이고 아직도 편 가르기로 부딪히는 많은 갈등의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네편 내편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그 속에서 이 갈등과 선긋기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해볼 많은 문제들을 던져준다.

문양호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