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진리 없는 메신저의 도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TV 시리즈 <메시아>를 분석합니다. 예리한 CIA 요원이 주목한 남자, 신의 전령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 남자의 숭배자가 늘어날수록 사회는 점점 혼란해집니다. 미셸 모너헌, 메디 데비, 존 오티즈 등이 출연합니다. -편집자 주

넷플릭스 메시아
▲하나님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알 마시흐.
◈계시와 지식: 알 수는 없는, 단지 느낄 수만 있는 하나님?

<메시아>는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은 자로 자처하는 중동의 한 신흥종교 지도자, 혹은 종교 선동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국면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놀라운 이적들(죽은 이를 살리고, 물 위를 걷는)을 행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인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알 마시흐(Al-Masih, 아랍어로 메시아)라 부르며 추종하기 시작한다. 시리아-이스라엘-미국으로 이어지는 그의 행보는 이내 각국의 정치권 수뇌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신앙인들,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킨다.

여러 목회자와 교인들이 그를 재림 예수라 확신하는 가운데,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 요원들이 그의 정체와 선동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분주하게 정보를 모으고 그의 행적을 감시한다.

전편의 논평에서 <메시아>에 묘사된 이 신흥종교 지도자가 왜 성경에서 예언한 재림 예수가 될 수 없는지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밝혔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오늘날 미디어는 대체 왜 이런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가? 알 마시흐라는 인물에 대한 상상적 묘사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메시아>에 묘사된 알 마시흐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오로지 몇 명의 선별된 자들에게만 가르칠 뿐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는 내용마저 알아듣기 힘들 만큼 지극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의 가르침은 모두 대부분 이런 식이다.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은 곧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믿음대로 할 일을 행하라.”

이런 모습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춘 적이 없으며, “알아서 행하라”는 식으로 가르친 적도 없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데 허락된 범위는 정해져 있었지만, 그 범위 안에서 하나님 말씀은 감춰지지 않고 각자 행할 바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구체적인 계명으로 수여되었다.

이처럼 <메시아>에서 현대적으로 재창조된 하나님의 메신저의 모습이 지극히 모호한 가르침만 전하는 식으로 굳어진 이유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이루는 실존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확고한 신(神) 불가지론을 따르기 때문이다.

영감으로 수여된 계시를 하나님의 무류한 진리로 받아들이려는 복음주의 신앙과 달리, 실존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인간 실존 바깥 영역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전적인 신비 속에 감추인 분으로 가르친다.

하나님이 존재적으로 은폐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의 말씀 또한 지적으로 명료하게 알려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실존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통상 신에 대한 사유 노력을 잘 하지도 않지만, 혹 시도한다 해도 인간 각각의 삶에 직접 ‘느껴지는 대로의’ 신-인 관계를 이야기한다.

초월자를 혹은 그분의 뜻을 명료하게 알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각자 알아서 자기 삶에 가치있는 방식으로 초월자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메시아>의 알 마시흐가 그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방관에 가까운 가르침을 주고, 그 가르침마저 각자 마음에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권장하는 방식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고 바라는 신-인 관계의 모습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로써 <메시아>의 알 마시흐는 성경적인 메신저가 아니라 포스트모던적 메신저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넷플릭스 메시아
▲성경적 메신저와 거리가 먼 포스트모던적 메신저 알 마시흐.
◈계시와 실존: 탈기독교적 포스트모던 종교관의 대변인, 알 마시흐

그나마 알 마시흐가 하나님의 메신저를 자처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도록 권하는 데까지는 서사에 큰 무리가 없다. 여기까지는 종교적 믿음의 실존적 가치를 최소한이나마 인정하는 한도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관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후반부, 특히 마지막 회는 이런 태도마저 재차 뒤집히며 개운치 않은 결말을 선보인다. 알 마시흐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알 마시흐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체험하기를 열렬히 갈망했던 주변인들 대부분이 처참함 결말을 맞이한다.

암에 걸린 딸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알 마시흐를 찾아온 어머니는 결국 병으로 죽어버린 아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알 마시흐가 하나님의 참 메신저라고 확신하고 열렬히 그를 따랐던 목회자와 그 가정은 결국 알 마시흐가 아무 기척 없이 떠나버리면서, 배신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고 목회를 포기한다.

알 마시흐를 따라 이스라엘 국경 광야로 나간 추종자들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죽거나 믿음을 버리고 만다. 개중에는 알 마시흐가 거짓 선지자였음을 알고서 분노에 못 이겨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에 들어가 알 마시흐를 옹호하는 무슬림들에게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이러한 서사, 즉 알 마시흐에 대한 강렬한 신앙이 가져다준 결과가 결국 모호함, 배신감, 좌절, 하나님에 대한 원망, 죽음, 테러로 종결되는, 이 비극적인 서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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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마시흐를 굳게 믿고 따르다가 결국 배신감에 신앙을 버리고 마는 펠릭스 이게로 목사(존 오티스 분).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통상 성경이 가르쳐온 것처럼 결코 우리 삶의 고난과 한계를 ‘기적적으로’ 넘어서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기도 응답에 대한 신앙이 우리 삶의 현실적 경험에 들어맞지 않는 미신적인 열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둘째는 종교적 믿음에 의지해서 자기 삶에 대한 고유한 이해와 결단을 포기하면, 결국 허상을 따르다가 환멸에 처하는 비본래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에 따르면 초월자에 대한 신앙은, 각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의 구체적인 차이를 떠나, 애초 초월자를 직접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려는 그 본연의 열망 자체 때문에 삶을 왜곡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결국 <메시아>가 종교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우리 삶에 유의미한 종교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기 실존에 대한 존중이 되어야 하고, 이 실존이 현실적으로 항상 마주하고 관계맺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경외와 흠숭이 되어야 한다.

더 이상 구시대적인 하나님 신앙, 초월자 신앙은 우리에게 아무 가치가 없기도 하거니와, 이 허무한 신앙에 집착하는 이는 오히려 진리보다 거짓에, 행복보다 불행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이것이 <메시아>가 알 마시흐와 주변 인물의 서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전달하려는 생각이다.

오늘날 미디어 콘텐츠 가운데 초월자 신앙이 허무한 거짓이며, 삶을 온전하게 하기보다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 초월자 신앙을 비판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주로 근대성 즉 모더니티(modernity)에 기반을 두고서 신앙을 비판했다면, <메시아>는 탈근대성 즉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에 기반을 두고서 기존 종교들, 특히 기독교의 신앙을 비판하고 있다.

근대성에 기반을 둔 신앙 비판 콘텐츠가 주로 합리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의 허구성을 변론했다면, 탈근대성에 기반을 둔 신앙 비판 콘텐츠는 진리의 다원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의 전체성을 폭로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 과연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삶에 온전히 적용될 수 있는가? 애초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적 원리를 강제해서 우리 삶의 개별적인 가치와 소중함을 가리우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메시아>의 기독교 신앙 비판의 골자는 바로 이렇듯 포스트모던적 종교관에 기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주인공 알 마시흐가 그토록 모호한 가르침만 전하는 메신저로 등장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나로 통일할 수 없는 신-인 관계를 어떻게 획일적으로, 그것도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이 지도하고 규정해줄 수 있단 말인가? 알 마시흐는 이런 생각에 기대 사람들을 지도한다.

<메시아>의 서사는 미디어 콘텐츠의 기독교 신앙 해체 시도가 점진적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합리성과 도덕성을 넘어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질타하는 데 동조한다.

실존의 개별성과 고유성에 대한 극단적인 존중은 ‘진리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공동체적 신앙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과 비판의식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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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마시흐의 추종자였다가 버림받은 배신감에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로 돌변한 시리아 소년.
결국 <메시아> 같은 콘텐츠의 등장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신앙, 그리고 계시의 보편적 진리 주장에 대한 세간의 조소(嘲笑)와 반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조류는 향후 거세지면 거세졌지,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종교다원주의, 정치적 올바름(PC), 젠더 감수성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요소들을 적극 펼쳐내고 있는 미디어 기업 넷플릭스의 문화적 영향력이 갈수록 더 커져가는 현 상황에서 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반기독교 차원을 넘어 아예 탈기독교 성향으로 나아가는 주류 미디어 콘텐츠의 사상적 영향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길은, 결국 보다 나은 미디어 콘텐츠로 응수하는 것이다.

서사의 치밀함과 사유의 깊이를 확보한 보다 전문적인 기독교 미디어 콘텐츠의 개발과 제작이 절실한 상황이다.

<메시아>의 알 마시흐 같은 사이비 메시아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경적인 메시아를 소개하고 가르치는 콘텐츠 갱신이 지속적으로 시도돼야 한다.

넷플릭스 메시아
▲탈기독교 사상의 가장 강력한 전파자로 등극한 미디어 업계의 절대강자 넷플릭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