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도올학당 수다승철’ 6회 방송

도올은 그의 중용에 대한 강의 중, 화이트헤드가 “예수는 종교적 사실을 남겼고 붓다는 사실 아닌 독트린을 남겼다고 했는데 엉터리”라고 일갈했다.

그의 설명인즉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실제 독트린(교리) 중심이라는 것이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구축한 것처럼 보이고 예수는 삶을 통한 실천적인 역사적 사건을 남긴 것 같지만, 둘 다 교리 중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유교야말로 진정한 비종교적인 유일한 종교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교리라는 노아의 방주 안에 갇혀 있으면 망하는 거다. 방주의 문을 열고 나가 소통해야 한다. 천박한 교리의 체계에 머물지 말고 시대 상황에 따라 교리도 과학처럼 부단히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는 과거 이단 못지않게 변했다. 신약 27권을 핑계 삼아 억누르는 OO들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십자가와 부활의 교리로 21세기를 버틸 수 있다는 것은 환상 중 대환상이다.

예수께서 대속하고 돌아가셨다? 어떻게 한 사람이 남의 죄를 대속하는냐? 넌센스다! 단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가질 정도이면, 그(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왜 나 자신이 날 구원한다는 믿음은 못 갖는가?

불교는 따로 경전이 없고 누구나 깨닫는 대로 경전을 쓰고 참고할 수 있으니, 훨씬 시대에 맞고 생명력이 있고 과학적이다. 그런데 기독교나 불교와 달리 아무런 모순된 전제가 없고 과학과도 상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유교라고 주장했다.

도올에게 있어 예수의 십자가는 유의미하지 않으므로, 예수가 십자가를 진 사건을 종교적 사실이니 역사적 사건이니 하고 표현하는 자체가 엉터리로 들릴 뿐더러, 기독교의 십자가 구원은 그에게 복음서 기자들이 훗날 자신들이 처한 상황적 문제의식 속에서 고안해낸 한낱 드라마일 뿐이다.

그에 따르면 그런 드라마가 다름 아닌 기독교 교리로 둔갑해서 2천년간 세상을 마구 지배하고 속여왔다는 것이다.

과연 교리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오늘날 사람들이 교리라 칭하는 것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이런 것들을 우리가 나열하기 전에,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먼저 엄연히 존재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계시의 말씀을 주셨고, 예수께서 태어나셨고,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재림을 약속하셨고,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셨고, 승천하셨고,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실이 훗날 언어 세계에서 ‘교리’로 일컬어진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께선 자신의 이런 일들을 교리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선지자와 제자들과 군중들을 향해 스스로 행하심으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께선 자신의 그리스도성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믿지 않자 “날 믿지 않아도 내가 행하는 일만큼은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주님에겐 “행함”이란 말씀을 완증하는 유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리란 도올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 없는 형식적인 도그마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다이내믹하고 생명력 있게 소통되는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다.

그가 교리를 사건과 구별하고 추상적이거나 소통이 안 되는 갇힌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지와 무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도올이 단골로 말하는 원시 그리스도교 마가 교회 공동체니 갈릴리 민중이니 역사적 예수 탐구니 신구약간 상이함이니 이원론적인 서양철학의 한계니 우월한 동양의 노장철학적 사유니 하는 강의 내용은, 과거 많은 이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 이론을 도배해 근거로 삼고 있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실제 근본을 살펴보면 신학을 논하는 내적 자세에 있어 질적으로 양자가 너무 상이하다.

필자가 알기로 적어도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 중심에는, 비록 근본주의 신학과 해석적인 괴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시대적 소명이라 보여지는, 당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의 시대를 초월하는 근본 가치인 “예수의 십자가 고난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과 심오한 의미부여와 치열한 인간적 공감대가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안 박사의 민중신학엔 십자가를 진 ‘예수의 심장’이 진솔하게 살아 힘차게 고동치고 있었기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한신대 교수인 어떤 분이 쓴 고인이 된 안 박사에 대한 추모 글의 내용 중엔, 과거 한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심사 중에 안 박사가 사회정치학적 관점 일변도의 논문을 제출하고 복음의 본질을 계속 회피하는 답변을 하는 학생에게 격분하여, 호통을 치면서 두어 시간 동안을 정성껏 지도하던 정황을 목격하고 술회한 내용이 나온다.

“안 박사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순수와 정열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안 박사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고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러기에 무섭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평생을 내심으로 앓으면서 교회를 짝사랑한 평신도 신학자로서 그분을 존경하며 추모한다”고 술회했다.

이런 정황은 도올이 또 다른 강의에서 공자와 소크라테스를 설명하다 돌연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무릇 성인이란 겸손해야 하는 것이거늘 예수만이 특별하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를 높이며 교만하게 자신을 경배하라고 군림하는 자세를 취한다며, 적의 가득한 이즈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것과는 사뭇 무드가 다르다.

도올의 예수에 대한 설명은 강의마다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이나 논조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이 뒤죽박죽이다. 그 중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은 그가 요즘 신학대학원에서 곧 목사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 때문에 그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며 난색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말하길, 어떤 보수적인 믿음을 가진 신학생이 와서 구약과 삼위일체,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부활을 믿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불필요하다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자신이 가진 믿음을 부인하고 목사 안수를 포기해야 하고, 안수를 받으려면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학생도 자신이 다른 신학 교수들과는 달리 특별하게 실력이 있고 수준 높은 강의를 하는 것을 아는지라 그러기도 어렵다는 고민을 털어놓더라는 일화를 말하며, 자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에이 빌어먹을 나도 하나님을 믿어볼까 예수를 믿어볼까 별의별 생각을 다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인듯 얼버무렸다.

필자가 도올 때문에 며칠 전 찾아본 한신대 웹사이트에 나온 총장 인사말을 보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요한복음 말씀 제하에 “하나님의 택하심, 하나님의 기대,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란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신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신학 대학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한신대에서 그렇게 극도로 안티신앙적이고 반기독교적 사고를 넘어 적그리스도적 사고에 물든 도올 같은 이에게 명색이 신학대학 석좌 교수란 직함을 준 것도 놀랍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신학 강의 자릴 쾌히 내어준 신학 대학원도 사려 깊지 않고 터무니없게 무책임하게 여겨진다.

신학은 신앙과는 다른 인문학적 영역라도, 적어도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궁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학문이 기반하고 추구하는 핵심가치인 신성(神性)적 사안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는 갖추는 것이 진리를 탐구하는 자로서 양식있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과거 필자가 알던 몇몇 목사님들도 한신대 출신이고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이지만, 개혁주의 신학파에 속한 분들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예수를 이상하게 폄훼하는 일 같은 건 상상을 불허하는 바였다.

무엇보다 재래적인 샤머니즘이 전 삶의 영역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특별히 신학대학을 선택하여 들어간 진리 추구의 열정이 남다른 진지한 젊은이들의 순수한 영혼에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온갖 세상적인 궤휼과 기만으로 무장한 어두운 영의 독소를 뿌려대는 이를 신학 교수이자 신앙의 스승, 인생의 멘토로 섬겨야 하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울하게 생각된다.

안병무 박사에 대한 또 다른 추모 글을 읽어보면, 안 박사는 소년 시절부터 단순하고 올곧고 진실한 성품의 믿음을 지녔기에, 자주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때마다 타고난 언변에다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청년 때도 소유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예수 정신으로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노력을 쏟았다는 것이다.

언젠가 도올의 마가복음 강의 중 들었던 말이 아직도 필자에게 인상 깊이 남아있다. 내용인즉 그의 모친께서 소천하시기 전, 정성으로 섬기시던 교회의 주일 예배에 모친을 모시고 몇번 참석했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당시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모친과 자신의 얼굴을 봐서라도 자신에게 모친 앞에서 설교할 기회를 한 번이라도 주길 내심 바랐는데 끝내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깊은 불쾌감을 쏟아냈다.

언뜻 본인의 기대에 어긋난 서운한 마음이 필자로선 이해는 갔지만, 듣는 이의 양심상 거리끼는 무리한 이해나 영적 연민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마지막 모친과 함께한 추억으로 남게된 그런 주옥 같은 예배 시간에 평생 신실하셨던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로서 순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쁘게 좀 더 은혜로운 예배를 보았으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결국 그런 개인적인 서운함이 분노와 섞여, 기성 교회와 일반 목사들에 대해 가시 돋친 비아냥으로 비화하는 요인들 중 하나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결과를 낳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이고, 소천하신 어머니께도 예가 아닌 것이 되겠는가? 언젠가는 주님께서 그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시리라….

도올의 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또한 돌아보는 타산지석을 삼을 필요가 있다. 과거 민중신학이 지적한 케리그마적 신앙의 병폐란, 한 마디로 말 따로 몸 따로 신앙에 대한 반기인 것이다.

그들의 몸 신앙 부재에의 몸부림은 역사적 예수에 그리고 역사적 예수와 오클로스(민중)와의 관계에의 집중으로 클로즈업되었지만, 사실 이것이 새로운 각성일지언정 새로운 발견은 아닌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자들의 몸 신앙의 현장은 일상의 삶 속이며, 무엇보다 우리 자신 속이다. 신학의 상이함과 신앙의 진위 운운 이전에 요는 도올이 아니 우리 모두가 진정 “교회에 대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과연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민중신학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라고 한단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성경을 읽는 자체가 적어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이며 사건이 된다.

또한 성경 전체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의미 있는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고, 성경 안에 기록된 이야기들만이 인간 구원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사건들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국면국면이 다 구속사적 역사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대다수 한국의 비신자들에게 기독교가 살아 있는 생명 에너지로 충만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메마른 교리 중심의 종교로 식상하고 피곤하게만 여겨지는 것에 대해 한 번 깊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종교 환경 속에서 유독 빨리빨리 전도에 힘써옴으로써 대형교회를 일궈온 노력이 출중나지만, 이면엔 세상 사람들의 삶을 통해 마음이 깃든 서로의 관계가 무르익기도 전에 성급히 귀만 울린다는 느낌을 주게 되어, 자칫 교리의 홍수, 즉 전도의 방법이나 내용이 무례하고 거북하고 피해적인 것으로 인식지워졌을 수 있다.

비침습(?)적인 전도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항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일일 것이란 자각이 든다.

새삼 놀라운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지적하지만,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알아도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형벌을 내린신다는 점이다(살후 1:9-10).

묵묵히 우리 모두가 예수의 삶을 따라 살려고 꾸준히 노력을 하다 보면 기독교에 대해 가식이니 위선이니 드라마니 하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점차 그 드라마가 현실에 진행되고 있는 걸 느끼고, 나아가 감동적인 드라마에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차츰 드라마란 것이 실은 사실과 무관치 않은,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것이라는 자각에 불현듯 깜짝 놀라서, 종국엔 누가 이렇다 말하기도 전에 저들이 먼저 사실로서 외치게 될 날이 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