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영원에 뿌리박은 믿음

‘기독교 신앙’이 외면상으론 여타 종교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인간의 종교가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다. 이는 그것이 인간의 유한된 지성이나 종교성의 산물이 아닌 영원에 기원한 ‘신적인(divine)’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것의 뿌리인 ‘거듭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그리고 ‘영원 전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현재의 고백에서 하나님의 영원에로’ 걸쳐 있다.

새 봄, 500년 묵은 고목나무에도 어김없이 파란 새싹이 움튼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한 철(季節) 봄(春)의 조화(造化)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움튼 새싹을 근착시킨 500년(歲) 고목에 주목한다.

‘믿음’ 역시 그러하다. 현재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만 추적될 때, 제대로 관찰될 수 없다. 그것이 근원한 종합적인 하나님의 경륜 곧, ‘거듭남’‘그리스도의 구속’, ‘영원 전의 예정’안에서만 관찰될 수 있다.

이렇게 근원까지 훑는 입체적인 추적은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안목을 통해 이미 학습돼 있다.

그 근본이 상고이고(미 5:2), 영존하시는 하나님(사 9:6)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인(神人)’으로서의 입체적인 추적에 의해서만 파악됐다.

성육신은 감춰졌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유한된 시공간’을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포도주 기적은(요 2:7-10)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묵은 포도주’로 상징된 ‘영원한 생명’이 ‘물’이라는 현실 속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믿음’ 역시 ‘영원’을 ‘현실’에로 유인(誘引)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믿음’을 통해 자신을 향한 ‘영원 전 하나님의 구원 예정’을 실현한다. 누가 오늘 예수를 믿게 됐다면, ‘영원 전부터 그를 아셨던 하나님(롬 8:29-30, 살후 2:13)’이 오늘 그에게 만난 바 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녀에겐 생애 첫 대면이었지만, 영원 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던 분을 대면한 것이다. 그녀와의 ‘우물가 조우(well- encounter)’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설정한 곧, ‘우연을 가장한 연출’이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그를 올려다 보시며 ‘삭개오야’라고 이름을 부른 것은(눅 19:5), 그때 비로소 그의 이름이 처음 거명(擧名)된 것이 아니다. 창세 전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책에 친히 녹명했던 그의 이름을(계 13:8) 호명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영원에 연원(連原)한다. ‘한 사람의 믿음’은 창세 전 ‘하나님의 구원 예정’,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파송’, ‘거듭남’ 위에서 구축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전적 구원 경륜들이 도모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없다. 우리에게 믿음이 오기까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로 하여금 결코 ‘믿음’을 과소평가할 수 없게 한다.

만일 누가 ‘예수 믿어 얻는 구원(以信得救)’의 복음을 들을 때, ‘단지 믿는다고 구원을 얻어?’라며 믿음을 폄하하는 것은 ‘믿음’이 구축되기까지 드려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수고를 싸그리 무시하는 것이 된다.

◈아담만큼 오래 묵은 우리의 죄

‘믿음의 역사(歷史)’가 이렇게 뿌리 깊지만, ‘죄의 역사’ 역시 이에 못지않다. 물론 구원의 역사만큼은 아니지만. 이는 인류의 모든 죄가 아담의 원죄에 근간(根幹)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원죄 공유(原罪公有)’는 죄책(罪責)에 있어 남녀노소, 국가, 인종간의 차별을 없앤다.

대개 우리 사회에선 미성년자의 죄에 대해 관대하다. 형법에서도 그들의 죄에 대해선 가급적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들의 죄라고 가볍게 다루지 않으신다(잠 20:11).

그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이 결코 느슨하지 않다. 하나님은 어른과 똑같은 잣대로 그들을 심판하신다.

한 예로 엘리사 선지자를 대머리라 놀렸던 아이들 42명이 암곰에 의해 찢겨 죽게 하셨다(왕하 2:23-24). 만일 하나님이 철없는 아이들이라 하여 그들에게 기준을 달리 했다면, 결코 그런 심판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의 죄가 과소평가되지 않음은, 그들의 죄가 모든 인류가 공유(公有)한 아담의 ‘원죄’에 근원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나이는 어리지만, 공유된 아담의 원죄에서 나온 그들의 죄력(罪歷)은 아담 할아버지만큼 오래 묵었고, 죄질(罪質)에서도 그와 동일하다.

간혹 인간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동화 작가나 어린이 예찬론자들이 어린이들을 무죄한 천사로 묘사하는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젖먹이 아기가 제 엄마의 젖을 먹는 다른 아기를 노려보는 것을 보고 ‘원죄’를 확신했다 고 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의 죄의 동기에는 그의 기질을 비롯해, 다양한 외부 요인들이 포함되지만, 근본적인 요인은 그 안에 내재된 ‘원죄’이다. 곧 ‘내재된 원죄’에 기반하여 그가 처한 ‘현재적 상황’ 속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만일 그에게 ‘원죄’가 없다면, 그가 죄를 유발시킬만한 다양한 요인들 가운데 놓일지라도 범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죄’라는 한 뿌리에서 나오는 모든 인류의 죄는 ‘죄질(罪質)’에서도 ‘죄력(罪歷)’에서도 다 동일하다.

‘특정 시대’의 ‘특정한 죄’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고, 어느 순간 새로운 죄가 나타났다 해서 없던 죄가 비로소 처음 생겨난 것도 아니다.

시대, 지역, 환경에 따라 어떤 죄들이 더 많이 부각되고 어떤 죄들이 덜 부각될 뿐이다. 물자가 풍족치 않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선 ‘절도죄’가 기승을 부리고, 부자들 사이에선 육체의 쾌락과 관련된 죄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상례이다. 인류 모두에게 공유된 원죄의 동질성이 시대, 지역, 인종을 평균케 한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의 ‘살인과 간음’을 ‘마음의 미움과 음욕’과 동일시한 것도(요일 3:15, 마 5:27-28) 그것들이 ‘죄질(罪質)’과 ‘죄력(罪歷)’이 동일한 아담의 원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라면 다만 ‘전진의 정도’이다. 전자는 ‘마음의 생각’에서 ‘행위’로 전진했고, 후자는 ‘마음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점뿐이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은 아벨을 미워한 마음이 발전해서 된 것이고,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은 마음의 음욕이 발전해서 된 것이다.

둘이 비록 전진의 차이는 있지만 한 뿌리, 한 근원에서 나왔기에, 예수님이 둘을 동등하게 취급한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미움과 음욕’은 이미 ‘살인과 간음’의 시작이다.) 만일 원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둘의 죄가 동등시될 수 없다.

◈영원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구속

이처럼 ‘원죄’에 기원한 인류의 ‘묵은 죄’를 구속하려면 그것이(구속이) ‘원죄’까지 소급할 수 있는 효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그 ‘구속’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구속자’가 돼야 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그것의 ‘완전성’에 있어서도 더 요구될 것이 없게 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단번에 드려 이룬 ‘영원한 속죄’는 말 그대로 그 자체로 ‘완전하고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오히려 거기에 무엇을 첨가시킬 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운 것 같이 되므로(마 9:16)”,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여(갈 2:21)” 그의 속죄를 무효화 한다.

이렇게 ‘단번에’, ‘영원히’ 이룬 그리스도의 구속은 택자 구원을 공고하고 안전하게 했다. 혹 인간의 실수와 허물로 인해 이미 얻은 구속이 훼손되거나 취소당할 수 없게 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담의 원죄(히 9:15)’와 ‘우리의 자범죄(벧전 1:18)’ 모두를 구속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0, 14).”

만일 우리의 구속이 인간적인 약점이나 실수로 인해 취소될 수 있다면, 그 구속을 ‘신적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혹 우리가 잘못하여 넘어졌어도, 우리로 하여금 밍기적거리지 않고, 벌떡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근거도 그리스도가 이루신 ‘영원하고 완전한’구속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목사(인천 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