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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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한 예배당. ⓒUnsplash
삶을 제대로 정의하라

삶은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나누기’라고 정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삶은 ‘더하기’라고 정의한다. 삶을 ‘더하기’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하나 더 보탠다. 삶은 ‘고지전’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

삶을 ‘고지전’으로 정의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한다. 더 좋은 동네에서 살려고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려 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들은 물불을 가라지 않고 더하기에 바쁘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받는 아픔에 하소연하기 바쁘다.

이런 삶은 사람다운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가 잠시 온라인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에 대해 불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예배를 강행하기도 한다. 천주교나 불교는 미사나 예불을 드리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정의를 잘못한 사람이다.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한 방향만 응시하고 있는 마네킹과 같은 삶이다. 이는 남에게 관심을 끌고자 하는 삶이기 때문이. 이런 삶은 겉은 화려한지 몰라도 속은 병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지전’이 아니라 ‘희생전’이다

삶은 고지전을 행해 올라가는 삶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이기는 삶이다. 자기의 욕망을 이기는 삶이다. 자신의 잘못된 탐욕을 이기는 삶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이기는 고지전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 아니다. 자신을 이기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말이 있다. “상대방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자신을 이기면 일류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등이 목표가 아니다. 일류가 목표다. ‘온리 원’의 삶이 목표다. 세상 사람과 차별화된 삶이다.

예수님의 삶은 당시 바리새인과 차별된 삶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삶의 목적이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것이어야 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 일등은 누구나 가능하다. 일류는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되지 않는다. 일류의 삶은 모방으로 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삶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외침으로 되지 않는다. 자신을 이기는 삶은 다짐으로만 되지 않는다. 예수님과 낮아짐으로만 가능하다.

일류의 삶은 멋진 삶이다. 일류의 삶이란 자신을 이길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남을 이기는 일등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일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배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바울 등이 살았던 삶이기 때문이다.

‘일류의 삶’은 내면을 가꿈으로 가능하다

일류의 삶은 내면을 가꾸는 삶이다. 내면을 가꾸면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내면을 쌓지 않고 일등을 추구했던, 즉 고지전을 추구했던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향해 했던 말이 있다.
“그들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들은 결핵균처럼 취급당해야 한다.”, “유대인을 제거하지 않는 국가는 멸망했다.”

나치가 폴란드 문제를 해결할 때도 말도 안 되는 합의를 했다. “유대인, 지식인, 성직자, 귀족의 박멸.”

내면을 가꾸는 삶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덴마크 사람하면 떠오르는 말이 ‘휘게 라이프’다. ‘휘게 라이프’는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뜻한다. 우리나라 말로 ‘소확행’이다.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누린다. 나아가 일류의 삶인 내면을 가꾸는 삶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다. 삶에 만족과 의미가 있다면 일류의 삶이다.

신앙생활은 일등의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다. 일류를 추구한다.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작은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런 의미로 신앙생활은 일류의 삶이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고지전을 추구한 사람이라면, 이때부터 갑질을 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꾼으로 살아간다. 호화주택에서 세계 여행을 다니며 배를 두드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내면을 가꾸는 삶을 추구했던 아브라함은 소박한 삶을 추구했다. 하나님을 만났던 곳으로 간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곳으로 간다. 다름 아닌 예배자로 살기 위해 간 것이다.

기독교는 예배가 중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자 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아우성친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예배는 죄악된 삶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이끄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

예배에 실패하면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죄악이다. 중세에 7대 죄악이 있었다. 교만, 분노, 시기, 탐욕, 폭식, 질투, 나태 등이다.

예배의 삶은 7대 죄악이 아니라 7대 주선으로 이끈다. 7대 주선은 순결, 절제, 자선, 근면, 인내, 친절, 겸손이다. 이는 하나님을 위한 삶이다. 곧 일류의 삶이다.

7대 주선은 인간을 위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다. 하나님을 위한 삶은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의 삶은 한 마디로 희생의 삶이다.

어떤 책에 보니 ‘믿음의 삶은 헌신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결국 믿음의 삶은 남을 위해 조건 없이 헌신하는 삶이다. 즉 일류의 삶이다.

7대 죄악은 나를 이기지 못할 때 저지른다. 7대 주선은 나를 이길 때 하게 된다. 결국 나를 이겨야 일류의 삶을 살 수 있다.

나를 이기는 삶에도 기준이 있다. 인간의 선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다. 내가 기준이 되면 결국 7대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십자가가 기준이 되면 희생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이기는 일등의 삶을 추구하면 안 된다. 나를 이기는 일류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일류의 삶을 사는 원칙: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일류의 삶을 살려면 원칙이 있다.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살아야 한다. 덧셈으로 사는 삶은 보태는 삶이다. 하지만 뺄셈으로 사는 삶은 나누는 삶이다. 헌신하는 삶이고 희생하는 삶이다. 즉,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는 ‘뺄셈’의 삶의 절정이다. 자신을 찢어서 죽어 마땅한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현실에서 나눔의 삶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다.

잠실역에만 해도 헌혈하는 곳이 있다. 나누는 삶의 작은 실천이다. 피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피 한 방울 나누는 삶이다. 코로나19로 의료진이 필요한 대구에 달려가는 삶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현재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노자도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나누지 않았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경》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덕경》은 우연한 기회에 이 땅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2,500년 전 중국 노자 시대의 윤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함곡관이란 곳의 수문장이었다.

어느 날 과거 장서실 관리였던 노자가 몰락하는 주나라에서 소를 타고 떠날 때, 마침 함곡관의 수문장이었다.

그는 노자가 대단한 능력이 있음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 소를 타고 가는 노자를 보자마자 그의 비범함을 첫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 던졌다.

“어디로 가십니까?”

노자가 어디 멀리 간다고 하자, 노자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이제 이곳을 떠나려 하시니 부디 가르침을 남겨 주십시오.‘

노자는 윤희의 부탁이 하도 간곡하여, 5,000여자 정도 되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 이 글이 노자의 그 유명한 《도덕경》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니, 다른 사람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니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비칠 수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목사님이다!’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다. 동시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저는 아낌없는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라고 한 말을 아내와 아들이 들었다면, 배꼽 잡고 웃을 것이 확실하다.

제가 아낌없이 주는 목사가 아니라는 증거는 널려 있다. 저는 맛있는 것은 제가 먹으려 한다. 하지만 먹기 싫은 것은 아낌없이 준다. 그러니 아낌없이 주는 목사가 아니다.

제가 아낌없이 주는 것도 있긴 하다. 노자와 같이 제가 가진 지식은 아낌없이 준다. 아니 못 줘서 안달이다. 아낌없이 준 적도 있다. 개척을 오금동에서 했다. 교회 이전을 하려 할 때 아낌없이 주고 나온 적이 있다.

하나님의 일에는 아낌없이 주고자 노력한다. 먹는 것에 욕심이 거의 없는데, 욕심이 있을 때가 있다. 맛있는 것이다. 이는 어릴 적부터 많이 아팠던 이유가 크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류의 삶을 살려면 원칙이 있다.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살아야 한다. 내 것이라고 움켜쥐려고 하면 안 된다. 내 것으로 남에게 주려고 해야 한다.

한때 ‘마스크’가 ‘금스크’였다. 돈이 있어도 구입할 수 없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금스크’를 두 주간 한 장씩 받았다. 그때 다시 깨달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예배가 일류의 삶을 살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일류의 삶을 사는 비결이 있다. 바로 우상이나 교주가 아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다.

신천지는 교주를 위한 존재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 늙어 쓸모없는 집단의 교주가 아니라, 참 신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다.

예배의 삶이 중요하다. 예배의 삶이 중요한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의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브라함과 같이 예배자로 살고자 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 일류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일류의 삶이 아니라 삼류의 삶이었다.

삼류의 삶을 산 것은 그가 믿음으로 돌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예배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간 것은 ‘빨강 신호등’에 반응한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사거리에서 ‘파란신호등’일 때 건너가야 한다. 빨강 신호등에 건너가면 큰 일 난다.

아브라함이 예배의 삶에 실패하자 기근이 두려웠다. 하나님이 두려워야 하는 데 상황이 두려웠다. 결국 아브라함이 빨강 신호등에 반응했다. 빨강 신호등에 반응했다가 애굽의 왕에게 호되게 당한 뒤, 가나안 땅에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예배였다. 그래서 예배를 드렸던 곳으로 갔다. 그곳이 벧엘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결정하는 신호등은 바로 예배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일상의 신호등이다. 예배를 드리면 빨강 신호등이 아니라 파란 신호등에 반응 하게 된다. 7대 악이 아니라 7대 선에 반응하게 된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빨간 신호등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예배가 삶의 신호등이다. 예배가 파란 신호등에 반응하게 한다. 즉 일류의 삶을 살게 한다.

‘신호등 신앙’과 ‘네온사인 신앙’

예배가 삶의 신호등이다. 만약 예배가 삶의 중심이 안 되면, 신호등이 아니라 밤의 네온사인에 반응을 보인다.

신호등은 구분이 명확하다. 그러나 네온사인은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어떤 곳으로 가야 하는지 구분이 흐릿하다.

반대로 신호등은 구분이 분명하다. 일상의 신호등인 예배를 드리면 명확한 것에 반응한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흐릿한 것을 쫓아간다. 예배는 일상의 신호등이다.

예배를 드리면 내가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이 선명해진다. 하지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내가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이 경계선이 모호해진다.

그리스도인은 파란 신호등에 반응을 보여야 한다. 빨강 신호등과 네온사인에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 당신은 어디에 반응을 보이는가?

색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 모른다. 신호등이면 어떻고, 네온사인이면 어떠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색이 중요하다. 신호등을 따라야 한다. 신호등의 색깔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배가 중요하다. 즉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신앙은 두 종류가 있다. ‘신호등 신앙’과 ‘네온사인 신앙’이다. 네온사인 신앙은 내 마음이 주도한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 어떻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은 신앙인이 된다.

럭비공과 같은 신앙인은 중심이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중심이 불안정하니 늘 불안하다. 언제나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눈만 감았다 뜨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눈 깜짝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와 같이 중심이 불안한 신앙이 네온사인 신앙이다.

신앙생활은 중심잡기다

신앙생활은 중심이 중요하다. 그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중심 되게 하는 것이 예배다. 그러므로 신호등 역할을 하는 예배가 중요하다.

자전거를 타려면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은 자전거 중심을 잡는다. 반대로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자전거 중심을 잡을 줄 모른다. 자전거 중심잡기에 실패하면 100% 넘어진다.

자전거 타기는 중심잡기로부터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중심잡기로부터 시작된다. 신앙생활의 중심을 잡게 하는 것이 예배다. 예배는 일상의 중심잡기다. 예배는 삶의 중심잡기다.

삶의 중심은 예배에 의해 결정된다. 저는 삶에서 예배를 가장 중요시한다. 특히 주일 예배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예배를 통해 중심이 잡히면 일주일을 멋지게 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배에서 중심을 못 잡으면 일주일이 엉망진창으로 산다. 일주일간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다. 성질만 나게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소중한 시간이 낭비가 일상이 된다. 뒤돌아보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중심이 두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께 중심 맞추게 한다. 예배가 하나님께 중심을 맞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전 시계는 때에 따라 ‘밥’을 주어야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태엽을 감아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추가 느리게 움직여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때에 따라 태엽을 돌려주면 시각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는 마치 태엽을 돌려 시게에 밥을 주는 것과 같다. 예배를 잘 드리면, 삶에 균형이 잡힌다.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는 하나님께 중심을 맞추게 하는 시간이다. 그럼 예배가 일주일 삶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예배는 삶의 신호등이어야 한다. 종종 예배가 삶의 신호등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으로 중심이 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악인전》에 등장하는 살인자는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에게 하나님이 중심 잡혀 있지 않으니 삶이 악하다.

이 영화는 경찰과 조폭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쁜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인 ‘교회 다니는 연쇄살인자’를 잡는 과정을 그렸다.

하나님으로 중심 잡혀 있지 않으면, 악이 일상이 된다. 창세기에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하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그러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성경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 3:12)”.

가인을 악한 자라고 한다. 《악인전》의 연쇄살인자는 악인이었다. 조폭과 경찰보다 더 악인이었다. 사람들이 악인은 싫어한다. 악인은 더 악인을 싫어한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을 본받지 말라고 한다. 이는 악인은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한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요삼 1:11).”

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예배다. 예배가 중심을 잡아주면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배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면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예배가 삶의 ‘오프너’다

오늘 아브라함은 벧엘로 올라간다. 그가 에굽에서 겪지 않아야 할 일을 겪은 뒤, 예배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벧엘은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이다. 그가 벧엘에서는 한 위대한 행동을 했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4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삶의 중심을 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삶의 중심을 자기 생각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더 이상 세상 때문에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해진 삶을 뜻한다. 다른 말로 기준점을 하나님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네온사인, 빨강 신호등이 아니라, 파란 신호등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삶의 기준점이다

하나님이냐,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이 기준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인생은 두 가지뿐이다. ‘진품 인생’과 ‘모조품 인생’이다. 기준점에 따라, 이 두 삶이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진품 인생’과 ‘모조품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예배다. 예배가 소홀해지면 진품 인생을 살고 싶어도 모조품 인생을 살게 된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남의 욕망만 만족시켜 주는 삶은 ‘모조품 인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품 인생이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켜 주는 인생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예배가 일상의 신호등이 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통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를 한 마디로 정의내렸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예배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예배가 삶의 ‘오프너’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인 로버트 치알디니는 그의 책 《초전설득》에서 ‘오프너’ 라는 단어를 이야기한다. ‘오프너’는 사전 연출이나 메시지를 뜻한다. 즉 오프너는 설득 과정을 시작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설득의 시작 단계를 ‘오프너’라고 한다면, 예배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시작 과정이다. 오프너에 따라 ‘초전 설득’의 유무가 결정되듯이, 예배에 따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여부가 결정된다.

예배의 오프너가 잘 설정되면, 삶은 일류로 살게 된다. 독일에는 ‘히든챔피언’ 회사들이 전 세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독일이 세계적인 강한 나라가 된 데는 중소기업이 강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가장 큰 기업이 벤츠다. 그러나 이는 세계 9위로, 세계 7위 기업인 삼성보다 못하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 즉 독일은 ‘히든 챔피언’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 결과 세계 4대 강대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히든 챔피언이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출액 일정규모(40억 달러 이하) 의 기업으로, 세계시장에서 1-3위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세계 총 2,710개의 기업 가운데 독일 업체가 1,307개다.

히든 챔피언은 다른 말로 일류 기업이란 말이다. 독일이 1·2차 세계대전으로 나라가 황폐화되었지만 지금 세계 4위 경재대국이 된 것은 히든 챔피언, 즉 일류의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삼성은 회사는 큰지 모르나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등 세계적 기업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에 보니 삼성은 경찰과 짜고 노조 설립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한다. 이는 일류가 아니라 삼류 기업임을 보여준다.

독일이 강대국인 것은 일류인 히든 챔피언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독일 경제를 받치고 있는 것, 산업 경쟁력이 세계 1위인 것은 히든 챔피언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히든 챔피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한다.

최근 97세로 하늘나라 부름을 받은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의 책 《상상이 담긴 설교》에서 설교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설교는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설교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듯, 예배로 동일하게 성도가 파란 신호등에 반응하느냐 빨강 신호등에 반응하느냐를 결정짓게 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으로 중심이 잡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일류의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이다.

예배가 일류의 삶과 삼류의 삶을 결정한다. 그것은 예배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히든챔피언으로 살도록 만들어주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파란신호등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예배는 일상의 신호등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일주일을 일류처럼 살 수 있도록 드려야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예배를 통해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일상을 하나님이 중심축으로 삼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이기는 독서/절판》《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