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16장 16-34절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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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이소연 씨가 우주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여기 와서 지구를 보면 파랗고 아름답고 평화롭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이제 돌아가면 아름답게 살고 싶다,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지 말고 아름답게 살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소연 씨는 지구라는 별 안에서 살 때 이 세계가 다라고 생각했는데, 우주라는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지구 안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지구를 바라보자, 그 속에 사는 나도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좁음을 모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의 세계가 다인 줄 압니다. 우물이라는 세계 안에 갇혀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 나가보지 않는 이상 이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물 밖을 나가본 개구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물 안의 세계가 다가 아님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우물이라는 경계를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가 개구리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물이라는 경계를 넘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는 비결

우물이라는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주관적인 시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나와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나와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는 타인의 일을 대할 때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립니다. 내 문제는 제대로 해결 못하지만, 다른 사람을 상담해줄 때는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타인의 일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기하게 바둑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훈수 두는 사람에게는 어디에 바둑알을 놓아야 이길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수가 보입니다.

그 이유는 훈수를 두는 사람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삶에 대해 이런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보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가 보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길이 보입니다.

여종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은 바울

바울이 빌립보에서 한 여종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점을 쳐서 돈을 많이 벌었던 주인들이 수입이 끊기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을 하였습니다.

무리들도 선동하여 함께 고발하게 했습니다.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깊은 지하 감옥에 차꼬를 든든해 채워서 가두어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바울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린 여종을 자유케 해준 것이 잘못입니까? 이 일은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일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도 하나님의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감옥이 그들의 마음과 믿음까지 묶을 수는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

고통과 신음소리 대신 기도와 찬양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이더니,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죄수들을 매어놓은 차꼬가 다 풀려버렸습니다.

간수가 갑자기 이상해서 자다가 일어나 보니, 옥문이 다 열려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수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간수는 옥문이 열렸으니 죄수들이 다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울은 큰 소리로 “우리가 여기 있노라”고 하면서 간수의 자결을 말렸습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에게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까” 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간수 가운데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임하자, 간수는 바울과 바나바를 데려다가 맞은 곳을 씻어주고 간수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생각지 못한 구원의 기쁨이 간수의 가정가운데 놀랍게 임하였습니다.

간수의 가정뿐이겠습니까?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믿게 됐을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 바울과 실라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25절에 나오는 ‘한밤중에’라는 구절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기도하고 찬송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곧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한밤중이 되었을 때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왜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올렸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한 발 물러서서 이 사건을 바라본 이후에 기도하고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인간인지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 사건을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 지하감옥에 갇히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속에서 기도와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할 이유

우리가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매몰되면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 매몰된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뿐이었습니다.

문제 속에 매몰되면, 문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매몰되면 그 상황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며 핑계만 댑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 상황에 매몰되면 안 됩니다. 상황 가운데 매몰되면 끝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이 상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매몰되었다면,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상황에 매몰되었다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상황에 매몰되어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부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항상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제가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나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나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에게 가장 큰 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나 자신입니다. 반대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우군도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인생의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인생의 적인 아닌 우군으로 만들려면,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몰되면 자기착취 현상이 나타난다

JTBC ‘차이나는 클래스’에서 강의를 해서 큰 호응을 얻었던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자기착취’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김누리 교수는 지금 한국은 끔찍한 ‘자기착취’ 사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은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노예를 착취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착취는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착취가 부분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이 주된 착취 방식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김누리 교수는 이것이 ‘자기착취’라고 이야기합니다. 타인이 착취를 하는 경우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착취하는 자에 대한 저항의식이 생깁니다. 저항의식이 결국 노예해방을 가져온 것 아닙니까?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죄의식이 생깁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 ‘내가 못나서 그런 거야’, ‘내가 더 노력해야 해’,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착취합니다.

자기착취는 곧 자기에게 매몰돼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정적 부분에 매몰되면 ‘자기착취’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헨리 이야기

‘사소한 큰 것들’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헨리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럭비부 선수였던 헨리는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포르투갈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여행을 시작한지 다섯째 날 헨리는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건강한 고등학생이 하루아침에 전신마비가 되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헨리는 그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후회보다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햇살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헨리는 휠체어 앉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책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그린 그림은 영국 전역에 전시되었고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 마지막 부분에서 헨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당연히 우울할 거라 여기고 마음이 어떠냐고 물어올 때, 이렇게 대답한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내가 어때서요? 나는 아침마다 지금 인생에서 누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눈을 뜹니다. 나는 날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여러 단계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 자신을 앞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도전 과제가 있습니다.

나는 늘 배우고 있고, 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나는 내가 무척이나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풀이 죽어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행복해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다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인생은 훨씬 더 단순하고 행복해집니다. 모든 날이 좋은 날입니다.”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헨리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모습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니 불평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불행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보였습니다. 인생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비록 매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한 발 물러서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도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게 됩니다.

우리도 나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되게 될 때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적군이 아닌 우군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나 외에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바라볼 때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내 입장만 가지고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도 내 경험에만 비추어서 바라볼 때도 많습니다.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시각을 바라보면 잘못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캐리어 법칙

우리에게 에어컨으로 잘 알려진 캐리어 그룹 대표였던 윌리스 H. 캐리어가 실행한 인생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캐리어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이 법칙은 사람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캐리어는 최악의 상황 가운데 놓였을 때 자기 자신에게 세 가지를 실행해 보라고 말합니다.

첫째,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어떤 것인가, 질문을 던지라.
둘째,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셋째, 침착하게 최악의 상황을 개선시킬 방법을 찾아라.

미국 윈체스터 시에 살던 알 P. 하네라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위궤양에 걸렸습니다. 피를 토하고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매일 위를 세척해야 했습니다.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어, 몸무게가 79킬로그램에서 40킬로그램으로 줄었습니다. 결국 의사는 나을 가망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 캐리어 법칙대로 세 가지를 실행해 보았습니다.

“1. 지금 이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죽음이다. 2.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죽음을 받아들이자 3. 그러나 이왕 죽을 것, 내가 그동안 회사 다니느라 꿈만 꾸던 세계여행을 한 번 해보자. 여행 중에 죽을 수도 있으니 유언도 쓰자.”

그는 만약 자기가 죽을 경우 시체처리 방법에 대한 부탁까지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넓은 망망대해와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바라보니 시가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노래도 절로 흥얼거렸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니 식욕도 생겼습니다. 세계 여행을 마치고 나니 위궤양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놀라울 만큼 체중도 회복되었고 여행을 반대했던 가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결국 알 P. 하네는 캐리어 법칙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도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캐리어 법칙을 한 번 활용해 보십시오. 결국 캐리어 법칙은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법칙입니다.

돈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지만, 지금은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화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왜 돈을 벌려고 하는 지? 돈이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는지? 돈 때문에 신앙이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돈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환경과 사건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칭기즈칸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알렉산더와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점령한 지역을 다 합한 것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이 칭기즈칸입니다. 그는 겨우 20만명의 군사를 가지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봄으로 그것을 하나하나 이겨나갔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 갇힌 것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았을 때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지게 됩니다. 문제의 해답을 보게 됩니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주님의 시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을 통해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과 나 사이에 주님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내가 보는 것과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주님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내가 어떤 사건과 환경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이 사건과 환경을 바라보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간음한 사건을 바라보고,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건이 아닌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이 바라보았을 때는 여인뿐 아니라 모두가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돌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이 죄의 소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보는 것과 주님이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자신들과 상황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니 이 상황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모든 상황과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만 바라보면, 우리는 이 상황 가운데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이 상황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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