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고 하면,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있다.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전자’로부터는 ’광신자‘로, ’후자‘로부터는 ’값싼 구원론자‘로 매도당한다.

그들의 심중엔 십중팔구(十中八九) ‘구원이 그렇게 쉽나?’라는 생각이 담겨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고안물이 아닌, 성경 전체의 요지(要旨)이다.

”누구든지 주의(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롬 10:13)“, “그(예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계시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은 구약 시대엔 ‘예수 이름으로 얻는 구원’이 직접 언급되는 대신, 여러 상징들로 표현됐다. 성전도 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왕상 5:5; 9:3)’은 신약시대의 ‘예수 이름‘을 대신한 것이었다.

이는 후에 예수님이 성전을 ’자기 육체‘와 동일시 한데서(요 2:21) 확인됐으며, 오늘날 성전인 ’예수 이름‘을 영접한 자를 하나님이 구원하여 그 안에 거하시는(고전 3:16) 것을 통해서도 확증된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Philistine) 적장 골리앗(Goliath)을 거꾸러뜨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은(삼상 17:45-49) 장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예수 이름’의 예표였다.

요엘(Joel) 선지자가 말한 구원을 주는 호칭 ‘여호와의 이름(욜 2:32)’은 신약에선 ‘예수 이름(행 2:21)’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들로 나타난 것이다(요 5:43).

‘구원에의 초대’인 ‘복음’ 역시 ‘예수 이름’이다(살후 1:8, 요일 5:13).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초대교회의 최대 이슈(issue)도 ‘예수 이름’이었다. 율법적인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유대교도들(Judeas) 사이에 불쑥 등장한 ‘예수 이름으로 얻는 구원’은 그들을 맨붕에 빠뜨렸고, 당연히 그들의 핍박을 불러왔다(행 18:5-28). 초대교회 300여년의 길고 긴 핍박의 역사는 순전히 ‘예수 이름’때문이었다.

핍박자들이 전도자들을 풀어주면서 내건 요구가 “다신 예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것(행 4:18; 5:40)”이었음은, 그들의 핍박 이유가 ‘예수 이름’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초대교회에서 ‘예수 이름’이 제거됐다면, ‘이슈(issue)도 핍박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예수의 사람(갈 5:24)’이었던 것도, ‘예수 자랑’이 ‘참 그리스도인의 증표’로 치부된 것도(빌 3:3)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곧 기독교는 ‘예수 이름’이 전부라는 말이다. 거창한 ‘구원’에서 사사로운 ‘삶’까지 ‘예수 이름’을 떠나선 기독교 신앙이 논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예수 이름을 불러 얻는 구원’은 자기의 구원에 기여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 경륜이다.

성경이 ‘예수 이름의 구원’을 급박한 ’종말‘과 연관지은 것은(행 2:20-21) 구원을 주는 ’예수 이름‘이 종말에 나타났다는 뜻(벧전 1:5, 20) 외에, 죄인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엔 달리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없는 ’종말론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에겐 100년의 시간이 주어져도 그것을 자기 구원에 유용할 수 없는 절망적인 ‘종말적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들이 구원받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예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영광’에 집착하신다. 십계명의 셋째 계명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고 적시했을 정도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영예’를 중시하신다.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마 6:9)’이 첫머리에 장식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에 대한 집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모독을 받을 땐 지체 없이 저주를 내리신다(레 20:3, 말 2:2). 반면에 그의 이름을 인정하는 자를 높이신다(시 91:14).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시 106:8),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시 23:3) 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충성하고 헌신할 대상도 ‘하나님의 이름’, 곧 ‘예수 이름’이다. ‘복음에의 충성’은 ‘예수 이름에의 충성’이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전도’는 그의 ‘이름에의 충성’에 다름 아니다. 죽음을 불사한 사도들의 충성도 모두 ‘예수 이름’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행 15:25)”.

성도들이 하는 모든 봉사에서 그들의 이름은 감춰지고 ‘예수 이름’만이 드러나게 한 것도(골 3:17)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고전 1:2)”로 별호된 것도 ‘구원’과 자신들의 ‘모든 삶’이 예수 이름에 의존돼 있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이름’의 영예와 가치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의 집착’은 곧 ‘자기 영광에의 집착’이다.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 자신과의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특히 구원에 있어 하나님이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죄인을 구원하시고 여타의 어떤 것도 그것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오롯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이다(계 7:10-12).

◈예수, 존귀하고 사랑스런 이름

‘예수 이름’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단지 능력과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쇄만이 아니다. 구원받은 이들에게 ‘예수 이름’은 흠모와 찬탄의 주제이다. 그들은 그것에서 ‘그의 피’와 ‘하나님 사랑’을 보며(계 19:13), ‘감읍의 념’ 없이 그것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경건한 성도들이 ‘예수 이름’에 환호하며, 그것을 찬송의 독점 주제로 삼는 것은 그것의 영예와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아래는 널리 애창되는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라는 찬송시 이다. 시종 ‘예수 이름’으로 일관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거룩하신 ‘주의 이름’ 너의 방패삼아라. 환난 시험 당할 때에 주께 기도 드려라.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 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 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후렴)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사람들이 ‘예수 이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어찌 모든 것이 예수 이름만이냐?’며 ‘예수 이름의 구원’을 폄하하는 것은 ‘예수 이름’의 진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 진가를 발견한다면, 그들 역시 무능한 자신이 다른 아무 요구도 받음 없이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얻게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며, 감읍함으로 그것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이름’을 흠모하는 것은 단지 그것의 ‘효용성’ 때문이나 자신의 ‘취향’ 때문이 아닌, 그 안에 내재 하시는 ‘예수의 영’,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반응하게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말씀이 시사하는 그대로이다. ‘예수 이름’이 들려질 때, 그 이름의 주인인 ‘성령’이 그들 안에서 그것에 환호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람들이 교회 강단으로부터 ‘예수 이름’만 듣고 싶어하고 다른 설교엔 도리질하는 것도 그들의 ‘유별난 신앙 취향’ 때문이 아니다. 그들 안에 있는 ‘예수 이름’의 주인인 ‘성령’이 그것에 대해 긍·부정(肯不定)의 반응을 나타내신 결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 이름’에 환호하는 것은 ‘나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닌, 내 안의 ‘성령의 기호’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하찮게 보는 것 역시, ‘그들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니다.

그들 안에 ‘예수 이름’의 가치를 알아 볼, 그것의 주인인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