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최근 유튜브를 통해 ‘3분 묵상’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는 백성훈 목사.
배신을 당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점점 이기적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공동체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면서 배신을 하고, 친구간에 돈 문제로 배신하고, 부모와 자녀간에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저런 공약을 걸지만 당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신을 합니다.

이런 저런 배신의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결같이 정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그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이런 배신들이 존재합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이런 배신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라는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혀 놓습니다. 그래서 나와의 관계가 어떤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서로간의 관계가 가벼워지고 끊어지고 단절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로 배신하는 일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필자도 목회자로 살면서 많이 경험했고, 만나는 성도님들도 배신에 대한 상처가 없는 이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직장도, 가정도, 교회도 어떤 공동체에도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시편 55편은 신뢰하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다윗과 예레미야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누가 저자인지는 모르지만, 이와 상관없이 이들이 얼마나 큰 배신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더 고통스럽다고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큰 고통의 일을 당했습니다.

다윗과 예레미아의 수많은 배신들을 보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 신뢰하던 부하 아히도벨의 배신으로 큰 어려움을 당할 뻔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일하셔서, 후새라는 더 의리있는 친구이자 신하를 사용하시고 아히도벨의 배신을 막으십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뜻이 거절되자 자살을 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예레미야는 친구인 바스훌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바스훌은 당시 성전 총감독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는 예레미야를 배신했고,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은 후 다리에 착고를 채우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리고 목에 형틀을 채워 성전 문 위에 하룻동안 걸어두고 나서야 풀어줍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그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고 지어줍니다. 그 의미는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온다’는 뜻으로, 바벨론의 공격으로 포위당할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언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배신의 고통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4-5절)”.

이 구절이 독자인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저자가 다윗이든 예레미야든,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입니까. 그러나 그들도 친구의 배신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배신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싫어지고 미워져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닫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시인도 그런 상황들을 고백합니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6-7절)”.

시인도 날개가 있다면 멀리 도망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광야로 도망간다는 것은 다른 어려움이 있을텐데도, 광야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시인이 다윗이라면 더더욱 마음이 큰 애통함이 생깁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이 광야를 떠돌아 다니면서 도망 생활을 했는데, 왕이 된 후에 친구의 배신으로 다시 그 깊은 상처와 고난의 트라우마가 있던 광야로 다시 도망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배신당한 상처가 많으면 우리의 영혼도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필자도 오래 전에 아주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 때 배개가 다 눈물로 젖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6편 6절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저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모두 억울함이 풀리고 잘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억울한 채로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억울함이 생각날 때마다 술을 마시며 잊으려 하고, 거리에서 허공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트라우마가 남아 무슨 말만 하면 욱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필자도 억울한 마음에 잠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예배도 드리기 싫고 말씀도 보기 싫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개척 때부터 10년 이상 함께해온 부부에게 교회의 재정을 모두 맡겼는데, 서류를 꾸며서 대출을 받고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이 배신감에 깊은 우울증까지 생겼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은 믿었던 담임목사님이 교회의 상가 매매에 돈이 필요하니 잠시 빌려달라고 해서 교회에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하고 법정 소송까지 간 일이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목사님은 빌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억울함에 아내가 드러누웠던 적이 있습니다.

필자는 목회자로 살면서 많은 성도님들의 억울함을 들어 왔습니다.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상사가 씌운 누명에 승진도 포기해야 했고, 월급이 차압당하고 비난을 듣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은 건물주의 갑질에 큰 비용을 손해 보면서 떠나야 했고, 컨설팅을 받으려고 업체에 돈을 냈다가 돌려받지 못해 파산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말 우리 주변에, 아니 교회 안에서만 생각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고통 중에 결국 다시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그것이 시인의 우리와 다른 성숙함입니다. 누구도 고통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누구도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예레미야는 기도하며 이겨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찌 되겠지’ 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의 마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에 잊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아픈 상황들을 오히려 기억해 내며 하나님께 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절)”. 이처럼 시인은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탄식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예레미야도, 이처럼 원망하기보다 기도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이런 배신을 당할 때면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냐’는 의문을 품게 만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합니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고,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외로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결코 원망하며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 성령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도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거짓과 속임으로 배신하고 상처를 입게 만들어도, 우리는 기도함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편의 위로
▲시편의 위로 백성훈 | CLC | 280쪽 | 13,000원

하나님은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시인은 결국 기도의 끝자락에 가서 승리를 선포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실패자로 단언하고, 자신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21절)”.

배신자의 말이 당장은 유익을 구할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 탐욕이 드러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 악함들을 이겨내도록 일하십니다. 시인은 그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결론을 내립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2-23절)”.

이렇게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압니다. 결국에는 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시인도 그 고통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세상의 수많은 방법들에 기웃거리며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다 버리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팀사역의 원리>, <시편의 위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