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진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이인영 의원(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은 지난 2월 4일, 돌아오는 4월 총선이 시장·종교·언론 분야의 기존 패권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개헌카드를 다시금 꺼냈다. 당시, 그는 토지공개념을 입에 올리며 농업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실행을 내비쳤다. 노동근로대책으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제시하였다.

이에 앞서, 2018년 3월, 청와대에서는 토지공개념의 헌법 명문화를 대통령 개헌안으로 발표했었다. 청와대는 개헌안에 “사회적 불평등 심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토지공개념 내용을 명시했다”고 밝혔다. 당시 찬반여론이 팽배했었는데, 찬성측은 토지독점과 불로소득, 부동산 투기 등이 근절될 수 있다고 했고 반대측은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적 개헌이라고 맞섰다. 이 의원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총선 이후 사회주의 개헌을 선언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토지공개념에 대해서는 국가주의·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며 국민들에게 자유시장경제를 버리고 사회주의경제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한 여당 관계자는 “토지공개념 등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 토지공개념 문제는 현재 지역구 후보 간(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에도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는 핵심이슈가 되고 있다. 앞으로 총선이후에는 이 문제를 둘러싼 개헌논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필자는 이 의원이 ‘경자유전의 원칙’을 제시했을 때 문득, 과거 북한초기정권시 김일성 세력이 토지개혁 이전에 실행했던 ‘3·7제’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3·7제’와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 연결고리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일제 토지수탈을 맹비난한 북한의 내로남불

지난 달, 3월 11일(수요일), 북한 노동신문은 뜬금없이 일제 강점기하에 있었던 토지수탈에 대한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일제가 1910년 3월, <토지조사국관제>를 제정하면서 토지수탈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신문은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 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라는 제호 아래 세 개의 기사를 실었다. ‘악명높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식민지예속화를 노린 일제의 날강도적인 토지략탈행위’, ‘통채로 떼운 부대밭’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식민통치시기에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토지수탈을 했다고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일제의 조선 토지수탈을 반인륜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첫 시기부터 <토지조사령>과 <회사령>, <조선광업령>, <어업령>과 같은 식민지 악법을 조작하여 주요생산수단을 강탈하고 지하자원을 략탈하였습니다.”라는 김정일의 교시를 내세웠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였기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 장악이 식민지 지배권의 필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제의 토지약탈행위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04년~1905년에 걸쳐, 토지약탈을 준비한 일제는 토지와 건물 약탈을 합법화하기 위해 <토지가옥증명규칙>(1906년)과 <토지건물저당집행규칙>(1907년)을 만들었으며 1910년에는 <토지조사사업>,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을 구실로 토지약탈을 본격적으로 감행했다는 것이다. <토지조사령>은 종전의 토지 소유관계를 전면무효화하여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는 것으로 일제에 신고하여 승인받은 것만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기사 말미에는 “일제의 토지약탈행위야말로 그 비법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로서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고 덮어버릴 수가 없다”고 맹비난했다. 마지막 기사는 일제 강점기때 지주들의 악락한 행위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정권은 ‘반제계급교양’을 고취시키 위해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일제의 토지수탈을 여전히 들고나온 것이다. 해방 이후 김일성 세력의 토지수탈을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정말,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해방 전후, 토지개혁 이전의 사회적-환경적 요인

일제강점하 1920년대~1930년대 전반기에 걸쳐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환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42년 말, 봉건 지주는 전 농가 호수에 3.3%였지만, 그들이 소유한 토지의 면적은 전 농경지의 62.2%인 약 2백 8십만 정보(1정보, 3천평)였다. 96%에 달하는 농민들은 겨우, 전체 면적의 37.8%인 약 백 7십만 정보를 소유했다. 지주 1호당 26.7정보를 소유한 반면, 농민 1호당 0.55정보를 소유했던 것이다.

북한지역만 보면, 1943년 말, 북한의 총 경지 면적 약 2백만 정보 중 지주들의 토지는 약 백십육만 정보로 전체의 58.2%를 차지하였다. 지주 호수는 총 농가 호수에 비해 불과 4%에 불과한 약 4만 6천 호였다. 96%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겨우 40만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소작농(43.4%)들은 지주에게 수확물의 60~7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는데, 이것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은 산중으로 도망하여 화전민이 되었다. 북한지역에서만 화전민이 약 130여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은 소련군정이 내세운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세력(빨치산파,소련파,연안파,국내공산주의파)과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했다. 당시,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무엇보다 농업부문에서의 생산성 증대가 정치적 선점을 차지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반봉건제적 토지소유구조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생산의욕이 매우 감퇴된 상태였다. 토지개혁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적 요인이 조성된 것이다.

김일성 세력의 토지개혁 진행 과정 및 그 전략

토지개혁에 대한 가이드 라인은 소련 점령군이 처음 제시했다.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위원 크로챨의 <소련 점령군의 대북한 통치정책>(인민정부 수립요강)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크게 5가지의 통치정책이었다. 첫 번째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 마련이었다. 두 번째에서 토지문제를 다루었는데, 인구수에 비례해서 토지를 재분배하고 토착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에는 전부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성명서의 핵심은 일제 잔재의 청산 및 소련에 우호적인 노동자, 농민 중심의 인민정권 수립과 토지개혁 실행에 대한 지침이었다. 그 실천방안으로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가 수립되었고 3월부터 토지개혁에 전면돌입했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에 대해 “토지문제는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선차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초미의 문제입니다. 토지문제를 해결하여야만 농촌에 뿌리박은 반동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고 농민들을 봉건적 착취에서 해방하여 그들의 정치적 열성을 비상히 높일 수 있습니다” 라며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이 혁명은 제2단계로의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예비적 성격의 혁명이었다. 토지개혁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소련을 위시로한 동구라파와 중국에서의 토지개혁들보다 매우 단기간에 완료되었다.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 걸린 데 반해, 북한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농민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 동시에, 그들을 토지개혁 집행자로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김일성 세력이 토지개혁 이전에 제시한 ‘3·7제’였던 것이다.

‘3-7제’를 통한 통일전선구축

북한의 토지개혁 포스터
▲김일성은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인농에 대한 협동농장화를 추진하면서 사회주의경제체제 양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북한의 토지개혁 포스터. ⓒ미디어한국학 제공
김일성 세력은 농민들과의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토지개혁 첫 단계로 ‘3·7제’를 제시했다. 이것은 소작농이 농작물 수확의 30%만 지주에게 소작료로 지불하고 나머지 70%를 가지는 것이다. 해방 이전에는 60%~70%를 지주에게 지불했었다. 즉, ‘6·4제’, ‘7·3제’였다. ‘3·7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소작농이 부담했던 토지세를 지주가 부담하게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3·7제’에 대해 “우리는 3·7제 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농민들의 혁명적 기세를 지주의 땅을 빼앗기 위한 투쟁에로 계속 발전시켰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이 토지개혁 성공의 비책이었다.

‘3·7제’와 더불어 농민들에게, 토지를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전략으로 나름 정당성을 확보한 김일성 세력은 그다음 단계로 물리력,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각도, 시, 군, 면에 보안소를 설치하면서 김일성은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지주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할 수 있는 인민주권과 군대, 안전기관과 같은 권력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보안소 설치와는 별도로, 각 농촌에 ‘농촌위원회’를 설치했는데, 바로 여기가 농민들로 구성된 토지수탈의 말단 집행기관이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지도아래 그 집행 임무를 맡은 기관은 지방행정구역에 있어서는 도, 군, 면의 각 인민위원회였고, 그 하부조직으로 농촌에서는 ‘농촌위원회’였다. ‘농촌위원회’는 각 촌, 동에 5~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소작농(95%)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농촌위원회의 임무는 어떤 지주에게 어느 정도의 토지를 몰수할 것인가에 대해서 명부와 계획안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다음, 작성된 토지개혁실시계획안을 면 인민위원회에 송부하여 승인을 얻은 후 토지몰수를 직접 실행하는 것이다. 북한지역에서 농촌위원회가 대략 11,500개가 조직되었고 약 9만 명에 농민들이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토지수탈에 앞장섰다. 농촌위원회는 토지조사대, 선전대, 행동대, 자위대, 연락대, 경비대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자위대, 연락대 등은 토지개혁과정에서 농촌위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임무를 담당했었다.

계급노선·계급투쟁 성격의 토지개혁

토지개혁실행을 위한 제반 사항이 준비되자 김일성 세력은 본격적으로 토지개혁실시에 돌입했다. 토지개혁법령과 함께 공포된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의 적용으로 지주들의 토지개혁 반대 행동은 철저하게 억제되었다. 지주 재산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몰수대상 토지의 확정은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김일성은 몰수대상 토지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나라 농촌의 토지소유관계와 계급관계를 구체적으로 료해분석한데 기초하여 일제놈들과 그 앞잡이인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토지와 5정보 이상을 가지고 있는 지주의 토지, 그리고 자기가 경작하지 않고 남에게 소작주는 모든 토지를 몰수대상으로 규정하였다.”라고 했는데, 이는 몰수대상의 선정이 철저히 계급노선에 입각한 집행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북한지역에서 몰수된 토지는 약 100만 정보였는데, 이 중에 지주 소유지는 약 86만 정보로 몰수된 땅의 80%를 차지하였다.

북한의 토지몰수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일부 동구권 국가에서는 나치, 반역자, 대·중 지주의 토지만이 몰수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거의 모든 지주의 토지가 몰수된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들이 부분적으로 유상몰수방식을 취한 것에 반해, 북한은 예외 없이 무상몰수방식을 취했다.

토지몰수 후, 일차단계에서 김일성 세력은 98만여 정보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다. 약 72만 호의 농민들이 평균 1.35정보의 토지를 분배받고 자작농이 되었다. 그렇다고, 소유권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분배된 토지에 대해 매매는 물론 임대, 저당 및 상속할 수 없었으며 자신이 경작할 수 없을 때는 국가에 반납하도록 했다. 사실상 토지이용권, 즉 경작권의 분배였던 것이다.

이것만 봐도 김일성 세력의 토지개혁 목적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별 농민과 농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이 아닌, 사회주의 협동체제(협동농장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조치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봉건적 소유제도를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인농에 대한 협동농장화를 추진하면서 사회주의경제체제 양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1958년에 100%의 집단농장화를 이루었는데, 그 수가 약 3천 8백 개에 다다랐다.

나가는 말

앞서 확인한 대로, 북한 김일성 세력이 토지개혁을 성공한 것은 농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즉, 농민들과의 완벽한 통일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통일전선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3·7제’였다. 이것을 통해 농민들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얻은 김일성 세력은 본격적으로 토지몰수에 착수한 것이다. 농민들을 집행자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일시적으로 농민들에게 그 토지를 분배했었지만 결국, 사회주의경제 시스템인 집단농장화로 급전환시킴으로 농민들을 해방 이전의 소작농보다 더 못한 노예로 전락시켜 버렸다.

지난 2월, 이인영 의원이 제시한 ‘경자유전 원칙’은 농민들의 큰 환심을 살 만한 정책이다. 왜냐하면, 현재 남한의 농촌 상황은 농민들보다 도시민들이 땅을 더 많이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농지법에서는 1996년 이전 취득한 소유자의 경우 직접 경작을 하지 않아도 농지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현재, 농업인들은 ‘비농업인의 농지소유 확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경자유전의 원칙’ 제안은 총선에서 농민들의 표심을 얻는 히든카드 뿐만 아니라, 이후 개헌 시에도 농민들과의 통일전선 형성에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지 않을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토지공개념’의 이중 속성이다. 여권에서는 1989년 노태우 정부시기부터 나온 개념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이 타당하다"라고 한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여전히 찜찜하다. 이인영 의원도 총선이 기존 패권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재벌개혁을 강력시사 한 바 있다. 토지공개념에 원조 격인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토지 단일세를 제시하며 경제전 분야로의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한 것을 상기할 때인 것 같다.

*이 글은 WORLD VIEW 5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