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28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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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한 영국 병사가 있었습니다.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 그 병사만 빼고 전멸하고 맙니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구하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6개월 뒤 그 병사는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쳐 나와 구조되었습니다.

병사를 구출할 당시 병사의 손에는 지도 하나가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 병사가 손에 가지고 있었던 지도가 어떤 지도였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밀림을 그려놓은 지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하철 지도를 보면서, 살아서 그 조국, 그리던 영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되새기면서 그 위험한 밀림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엔가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생각보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그냥 산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희망은 전혀 없이, 자식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조차 없는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땅 가운데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 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은 채 자신 스스로를 ‘5포 세대, 7포 세대, N포 세대’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포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희망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죽음을 이긴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말기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죽음 앞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조차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가졌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100세 때 주신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했는지 아십니까?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8-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이삭으로 말미암아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였습니다. 만약 이삭이 죽고 없어지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팩트다

오늘은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쁨의 날이요. 소망의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저들에게 아무리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들을 가지고 설명을 해줘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해되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냥 알려줄 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확증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전 15:14)”.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 헛것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에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기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사흘이 지난 새벽, 곧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여인들은 무덤에 가면서도 무덤에 막혀 있는 돌문을 어떻게 옮길까 라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 여인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로부터 주의 천사가 내려와 인봉한 돌문을 굴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너무나 무서워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죽은 사람과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말을 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 28:5-7)”.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안 무서울 수 있습니까? 그 새벽에 지진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무덤의 돌문이 열어 있는데, 무서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섭기도 하였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 기뻤습니다. 여인들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신 예수님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여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말한 것처럼 동일하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

왜 주님은 천사를 통해 말하게 하시고 또 본인이 직접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제자들보다 먼저 가겠다고 하신 것은 이미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의미 있는 곳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만나시면 될텐데. 굳이 왜 갈릴리에서 보자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부분을 생각해 보려면, 먼저 갈릴리 지역이 어떠한 곳이며, 이 지역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곳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갈릴리 지역이란 우리나라 행정구역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의 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세 개의 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북부 지역인 갈릴리도와 그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도, 남부 지역인 유대도입니다.

북부 갈릴리 지역이란 대략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도 레바논 산지에서 내려오는 물과 습기가 풍성해, 강우량은 적지만 토지가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강과 시내가 발달해 있었고, 초장이 많아 목축업과 농사가 잘됐습니다. 또한 과수원이 많이 있었으며, 갈릴리 호수에서는 풍부한 어류들이 잡혔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풍부하다 보니, 이방 나라들로부터 갈릴리 지역은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지배자인 로마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로마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거칠고 투쟁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상류 사람들은 이 갈릴리 사람들을 무식하며 야만스러운 사람들로 여기고 천대를 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소외된 지방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시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천대받고 멸시받던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일할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갈릴리는 복음 선포가 처음 시작된 곳이요, 제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리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갈릴리는 예수님에게나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대면하기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의 회복을 꿈꾸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를 원하신 것은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소망을 잃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인해 좌절하였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그냥 버려두시거나 외면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의 삶에 새로운 소망과 생명력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가며 헌신을 다짐했던 그 열정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 위에 부활의 소망을 더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그 마음 가운데 있는 죽음의 두려움마저 이기고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첫 신앙의 자리이며, 부르심의 자리였던 갈릴리로 그들을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나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우리도 때로 제자들처럼 좌절과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만을 바라보고 달려 온 것 같은데, 뭐하나 제대로 된 것은 없는 것 같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 길이 없는 것 같은 환경 가운데 놓일 때가 있습니다. 삶에 대한 소망도 사라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갈릴리에서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갈릴리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던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십니까?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했던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십니까? 주님께로부터 처음 사명을 부여받은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십니까?

그 갈릴리에서 우리는 다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망과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때 절망은 소망으로 바뀝니다. 보이지 않는 길이 보이고 길이 열립니다.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변화된다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성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춘천에 있는 한마음교회입니다. 담임은 김성로 목사님이십니다.

김 목사님은 서른한 살에 예수를 믿고 서른 여덟 살에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무작정 대학 캠퍼스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사역을 하면서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왜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을 수없이 읽으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20년간을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다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이“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미션라이프 부분에 보면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계속 연재되고 있습니다. 그 간증을 보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의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갈릴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서 못박히신 예루살렘으로 내려옵니다. 예루살렘으로 내려와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승천의 모습을 지켜보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살기 위해 도망쳤던 제자들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끌려가게 됩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합니다.

예전의 베드로와 요한이라면 죽는 것이 두려워 그들의 협박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앞에서 너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야 한다

여러분의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면, 그 갈릴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기 위해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No cross, no crown”.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가 먼저 죽어야 부활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계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유정란은 암탉의 체내에서 난자와 정자의 접합에 의해 수정이 된 계란입니다. 즉 병아리로 부화시킬 수 있는 계란을 말합니다.

무정란은 암탉의 체내에서 난자와 정자의 접합이 안 된 계란입니다. 곧 병아리로 부화할 수 없는 계란입니다. 우리가 주로 먹는 계란은 무정란입니다. 닭이 유정란을 품으면 그 속에서 병아리가 탄생하지만, 무정란을 아무리 오래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무정란에는 생명이 없고 유정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의 유정란입니다.

아직 이 세상 가운데는 예수님의 생명이 없이 무정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희망임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사건이 돼야 합니다.

힘들고 지쳐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만이 희망이심을 선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