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게 사는 ‘도덕적인 사람(moral human)’이 되기보다, 당신만을 의지하는 ‘종교적인 사람(religious human)’이 되기를 원하신다.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목적도, 타락 후 그들을 구원한 목적도 모두 하나님 지향적인 ‘종교적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원죄자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을 그의 존재 기반, 공급, 소망으로 삼는 것을 저버린 ‘종교적 타락’이었다. 곧 ‘하나님 의존적(Dependence on God)’인 삶에서 ‘자립적(independent)’인 삶으로의 변질이었다. ‘도덕적 타락’은 ‘종교적 타락’의 결과물로서의 2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내용도 단지 ‘윤리적 존재로의 회복’이 아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된 자존적(自存的)이고 자기 우상화(self-idolization)된 가치관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그의 구원, 존재와 공급의 원천으로 삼는 ‘종교적인 삶에로의 복귀’이다.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종교’가 아닌 ‘도덕’ 문제에 둘 때, 기독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구원을 위해 도덕이 아닌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방법도 ‘도덕’이 아닌 ‘믿음(종교)’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으라’고 하신 것은, 그의 구원 해법이 ‘도덕적(moral)’이 아닌 ‘종교적(religious)’인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죄인으로 하여금 ‘도덕’을 통해서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귀하도록 했다.

구태여 ‘도덕적’, ‘종교적‘이라는 말로 양분한 것은 둘의 ’대립 개념‘이 그것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도덕폐기론자(antinomianist)‘의 주장처럼 우리 신앙에 도덕(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에 ‘도덕’과 ‘종교’가 함께 ‘조건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둘의 대립성은 인위적인 설정이 아닌,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다. 성경은 ‘도덕(율법)’과 ‘종교(믿음)’을 적대적인 구도로 놓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모두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 3:10)”.

풀이하면 ‘도덕(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믿음을 포기해야 하며’, ‘믿음으로 구원 얻으려면 도덕(율법)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때, ‘자기 의(義)의 확장’을 낳아 ‘그리스도 신앙’을 불식시키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차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도덕(율법)’을 배제하고 ‘믿음’만을 요구하신 것이나, 우리가 ‘신인 협력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도덕적 완전’을 꾀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과 같다.

이런 불가능한 일을 도모한 이들이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도덕(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봉쇄당했다.

반면에 ‘율법의 의’도 모르고, 율법으로 외롭게 되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만났다(의롭게 됐다). 아이러니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 9:30-31).”

◈그리스도 신앙은 하나님 신앙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의 범죄로 ‘하나님 신앙’에 실패한 후 제시된 대안책이 아니다. 무죄했을 때의 ‘하나님 신앙’이나 타락 후의 ‘그리스도 신앙’이나, 모두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다.

무죄했을 때의 ‘하나님 신앙’ 안에는 ‘성자 로고스(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 요 1:1) 신앙’이 있었고, 타락 후 ‘그리스도 신앙’안에는 ‘하나님 신앙’이 있다.

‘그리스도 신앙’과 ‘하나님 신앙’은 다르지 않으며, 둘은 서로 ‘대립’되거나 ‘분리’되지도 않는다.이 둘이 합하여 온전한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이룬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나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가 구약 신앙을 ‘성부 신앙’으로, 신약 신앙을 ‘성자 신앙’으로, 말세 신앙을 ‘성령 신앙’으로 나누는 것은 근본 ‘삼위일체 신앙관’을 파괴한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향해 ‘내게로 오라(마 11:28), 나를 믿으라(요 14:1)’고 초청하신 것은, 이제 성부 시대는 막을 내렸기에 성부 하나님을 축출하고 대신 그 자리에 성자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옹립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님 신앙’에의 초대였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능하여 직접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어 죽임을 당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하나님 신앙’에로의 복귀이다.

여기서 2위(位) 성자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복귀시키는 ‘중보자’ 지위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중보자 지위’에 대해서도, 계몽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의 모범 중보’개념 같은 것에 현혹돼선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중보’ 개념을 ‘속죄물’로서의 ‘종교적 중보’ 개념이 아닌, ‘도덕적 중보’ 개념을 취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단번에 속죄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켜 우리로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중보자’로 사신 그의 삶을 충실히 따름으로 하나님께 도달케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을 살아내는 일에만 심혈을 기우리게 되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갖게 되지 못한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단지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중보자’ 지위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에 그 자신이 ‘목적지(하나님)’가 된다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곧 그리스도께로 감이 삼위일체 하나님께로의 복귀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 신앙’으로 구현된 ‘하나님 신앙’에서, 당연히 하나님이 영광을 취하신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 6:29)”이라는 말씀은 죄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 구원받으므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린다는 뜻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는 말씀 역시 ‘그리스도 신앙’에서 ‘하나님 신앙’이 구현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성자와 성부가 하나(요 10:30)”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과 ‘하나님 신앙’의 분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두 위(位)의 일체’가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도,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삼위일체 된 하나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므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요 12:26), 성부 하나님을 높이므로 성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는 ‘삼위일체’ 완전한 신앙으로, 코로나19 시국을 지나는 모든 분들이 불안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