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4일 최한우 총장(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인터콥 본부장)이 국회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와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18 서울 퀴어축제
▲2018년 서울 퀴어축제 당시 설치된 ‘성중립 화장실’. ⓒ크투 DB
2. 네오마르크스주의와 젠더 이데올로기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배경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알려진 후기구조주의이다.

네오마르크스주의 정치문화 운동의 사상적 기반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헤겔의 절대정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자기소외를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근대 체제를 비판하며, 고전적 칼 마르크스주의 전략 수정을 요구하면서 기독교의 해체를 무엇보다도 강력히 열망한다.

대표적인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윌리 뮨젠버그(Willi Munzenberg, 1889-1940)

백만장자 유대인 뮨젠버그는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론으로 “지성인들을 조직화하여 서구 문명을 타락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존 서구사회의 모든 가치를 썩게 만듦으로 서구사회를 해체시키면 그 토양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1920년 초에 뮨젠버그나 루카치 같은 비판이론가들을 ‘수정주의자’로 보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뮨젠버그는 나치를 피해 남프랑스로 달아났다. 그는 체포된 후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나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 발견됐다.

뮨젠버그의 아버지는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게 성공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차별받고 있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면서, 안티기독교 감정이 깊게 뿌리내렸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자크 라캉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이며 미셀 푸코 등과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리비도란 '삶의 순수한 본능(pur instinct de vie)'이며 그것은 인간이 양성(兩性)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다.

그는 “남, 여는 상징계 안의 기호로서만 유효할 뿐 애초에 리비도는 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적 정체성 역시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라캉은 어린 시절에는 가톨릭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의대에 들어가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매우 거칠고 차가운 성격에다 여성편력이 극심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대표작 <차이와 반복(1968)>에서 차이(差異)의 철학을 설파하였다. 그는 라캉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들뢰즈는 ‘순수 차이’를 주창하면서 원래 세계를 순수 차이의 독립개체 rhizome로 보고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Rhizome 운동을 전개하였다.

순수 차이의 독립개체는 곧 완전 개체이며 따라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은 들뢰즈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 로고스 logos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며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들레즈의 Rhizome운동은 ①순수차이의 개체주의 조장 ②권위를 부정함으로써 상호의존의 공동체 해체 ③완전 독립개체 간의 성적 관계에는 차별적 남여 구분 없다는 논리에서 동성애 적극 옹호 등이다.

네오마르크스주의
▲위부터 뮨젠버그, 라캉, 들뢰즈.
이러한 순수차이 사상에서 ‘순수 차이를 인정하라’는 인권 개념에 근거한 법철학 사상을 도출시켜 차별금지법과 혐오범죄 규정의 법철학 사상을 헤게모니로 확산하여 법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 사회에 Rhizome운동으로 확산된 들뢰즈의 순수차이 사상은 유럽에서 차별금지법과 혐오범죄 규정의 법철학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신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상가 미셀 푸코는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라며 들뢰즈의 순수 차이의 철학을 칭송하였다.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에서 “동물은 불만이 없다. 긍정과 기쁨으로 살자”고 설파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1995년 11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러셀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공들이는 대중사회공학(mass social engineering)에 가세했다.

“생리학과 심리학은 과학 기술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심리학은 전달 방식의 발달과 함께 그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이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교육’ 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교실과 학생들을 상대로 갖가지 시도를 할 것이다. 가령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눈(snow)은 검다(dark)’는 굳건한 확신을 가지도록 세뇌시켜 유도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교육에서 가정의 영향력을 차단하라.
둘째, 만 열 살 이전에 주입(세뇌)을 시작해야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버트란드 러셀은 3번의 이혼과 4번의 결혼을 했다. 평소에 러셀은, “삶에 대한 열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딸 캐더린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항상 무언가 공허함과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70년 2월 기관지염으로 죽었다. 그의 마지막 부인 에디스와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는데, 죽는 순간까지 죽음의 두려움으로 공포에 질려 유언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평소에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철학적 자신감을 가진 버트란트 러셀이 죽음 앞에 벌벌 떨자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죽음 이후에 영원히 존재해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그는 책 <에로스와 문명>, 그리고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거짓된 자의식을 극복하게 되면 ‘성적으로 만족스러운 사회’가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적으로 만족스런 사회가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토피아이며, 이를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인 표현의 자유, 광란의 음악, 무정부주의적 혼란, 비이성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하게 하는 방법 등으로 사회를 무규범, 무질서의 아노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러한 비판이론은 마르크스철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신좌익(新左翼) 또는 네오마르크시즘이라고 불리며,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서 프로이트 좌파라고도 한다.

데리다의 해체론(論), 들뢰즈의 차이(差異)의 철학, 푸코의 탈중심화(脫中心化) 등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의 철학적 논리와 사유는 모두 서구(西歐)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저항으로 지적 체계화되었다.

즉 후기구조주의는 고대 이래의 ‘철학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철저한 자기비판임과 동시에,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 철학사상의 새로운 기획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적 세력으로서 기독교’를 적으로 보고, 혁명의 방법론으로써 문화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를 주창하였다.

1921년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공동 설립했으나 신속한 혁명에 대한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종교(유대교와 기독교)는 반사회적이고 몰역사적인 것’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서구의 기독교 문화 세력이 혁명의 길을 막고 서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안의 한편으로 기독교를 해체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상부구조 기관들을 장악하는 방법을 통한 긴 행진’으로 혁명 전략을 수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혁명은 사법부, 교육부, 언론, 정치 및 교회와 같은 권력과 영향력의 제도를 인계받는 방법, 즉 ‘조용한 혁명’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1930년대에 내부에서 유대교-기독교 문화를 무너뜨리는 조용한 혁명의 방법에 대해 2,000쪽 이상을 썼다. 그가 제시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조용한 문화혁명’ 아젠다는 다음과 같다:

①지속적인 사회변화로 혼란을 조성한다.
②학교와 선생의 권위를 약화시킨다.
③가족 해체를 추진한다.
④어린이들에게 성교육 및 동성애 교육을 실시한다.
⑤교회를 해체한다.
⑥대량 이주와 이민으로 민족 정체성을 파괴한다.
⑦인종 차별을 범죄로 규정한다.
⑧사법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든다.
⑨복지정책을 강화하여 국가나 기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한다.
⑩언론을 조종하고 대중 매체의 수준을 저하시킨다.
⑪과도한 음주를 홍보한다.

그람시는 사회의 헤게모니는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그룹의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이를 제공해 주는 주요 공간으로 학교, 언론매체, 교회 등이라는 주장을 했다.

네오마르크스주의
▲위부터 허버트 마르쿠제, 안토니오 그람시, 주디스 버틀러.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알튀세르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며 프랑스 공산 당원이었다. 그는 국가를 억압적 국가 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억압적 국가 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는 경찰, 법정, 감옥, 군대 등을 말하며, 지배 계급에게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배를 보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는 종교, 교육, 가족, 법, 정치, 노동 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말한다.

알튀세르는 역사 주체는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국가가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좌파는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며 사회주의가 독재하는 국가주의를 추구한다.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 1909-1972)

그람시 계열의 미국 네오마르크스주의자이며 공동체 조직가이다. 시카고 공산주의자인 알린스키는 1971년에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 저술에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 급진주의를 과시하지 말고 내부에서 체제에 침투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우리는 최초의 급진주의자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모든 전설, 신화, 그리고 역사에서… 최초의 급진주의자는 설계자(하나님)에 반역하여 적어도 승리했으며 그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루시퍼”라며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항한 루시퍼와 그의 사악한 제자 니므롯을 찬양했다(창 3:1-5, 10:9-11, 11:1-8 참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알린스키의 이와 같은 노골적 적대의식은 네오마르크스주의 이전 칼 마르크스에게도 강하게 나타난다.

칼 마르크스는 1841년 박사학위 제출 논문에서 신에 대한 신앙을 미신으로 보고, 신으로부터 자유를 통해 인간정신의 절대적 자율성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와 인간을 위해 절대 신을 배신하고 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인간문명을 일으켰다는 그리스 신화 인물인 프로메테우스를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칼 마르크스는 쾌락주의의 상징인 에피쿠르스와 절대자에 반란하며 인본주의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영웅화하면서 창조주의 통치에 대한 저항과 신으로부터 자유를 열망하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기획했던 것이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급진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반기독교적 성향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고 이후 핵심 사상은 그대로 보존되어 네오마르크스주의로 발달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증오하게 된 것은 그의 부모들이 기독교 전통이 강한 독일 작은 도시 트레아에 살면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차별받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면서 생긴 깊은 상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뮨젠버그처럼 상처받은 천재 아이가 자라서 짐승이 된 것이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알린스키는 철저한 안티기독교인으로서 사회운동을 통하여 미국 사회의 전통적 기반인 기독교를 해체시키는데 전력했다.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1961- ), 미국 동성애 합법화!

스탈린주의자 미국 공산당원 프랭크 마샬 데이비스(Frank Marshall Davis)로부터 어린 시절 멘토링을 받았다. 시카고로 이주 후 그는 사울 알린스키와 접촉, 그의 제자로 양육됐다.

그는 알린스키의 산업지역재단(Industrial Area Foundation)에서 교육을 받았고 1985년 이후 커뮤니티 조직가로 4년간 일했다. 그는 나중에 알린스키와 그의 네트워크 ACORN(개혁을 위한 지역사회단체 연합회, Association of Community Organizations for Reform Now)과 유권자 프로젝트(Project Vote) 두 그룹에서 근무했다.

알린스키의 아들 데이비드 알린스키(L. David Alinsky)는 알린스키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오바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오바마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매우 잘 배웠습니다. 2008년 민주당 선거 운동에 영향을 주기 위해 아버지의 조직 모델이 지역사회 조직을 넘어서서 미국 전역에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

프랑스 여성해방운동가이며 실존주의철학자인 보부아르는 싸르트르와 계약결혼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대표작 <제2의 성(1949)>, 제2부 ‘체험’의 첫 부분)”라고 주장하며, 전 생애 동안 성해방 운동과 동성애 옹호에 전력했다.

주디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근래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철학자이며 퀴어 이론가이다. UC버클리대학교 비교문화 및 수사학 교수인 주디 버틀러는 저서 <젠더 트러블(1990)>에서 인간의 성의식은 신체가 아니라 의식 상태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남성 여성으로 인간을 구분하지 말고 그냥 사람이라고만 하라고 한다. 버틀러는 퀴어 이론을 만들어, 사실상 전통의식 및 정신문화의 해체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이며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오르가즘의 기능>을 통해 욕구 표출로서의 사회적 순기능 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성적 만족이 국가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며, 성적 규범을 해체해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실현되면 국가경제는 발전한다며 성(性)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성정치 운동은 이후 성소수자 인권보호 운동으로 발달하였다.

신좌파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정치를 통해 국가와 사회 가치규범을 해체하며 아노미(Anomie) 상태로 만듦으로써 사회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요약하면,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구조모순과 착취와 억압으로 대변되는 정통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수정본과 프로이트의 성철학을 융합해서 만든, 포스트모던 해체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 젠더 이데올로기를 확장시켜 사회를 해체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용한 혁명'을 통해 상부조직, 즉 국가 권력을 서서히 장악해 나간다.

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유대인 좌파들이 주도해온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철저하게 안티기독교적이다.

최한우 최바울 젠더 이데올로기
▲최한우 총장이 강연하고 있다. ⓒ크투 DB
최한우 총장(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인터콥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