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 김욱동 역 | 민음사 | 420쪽 | 9,500원

말씀이 답 되고 법 되는 사회 위해 대륙 건너
거룩한 사회 꿈꾸다, 엄격한 사회 만들었다
말씀대로 살겠단 열망, 통제와 정죄 사회로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재개발. 도시는 새 옷을 갈아입는다. 오래되고 낡은 집들을 벗고, 새로운 모습이 들어선다. 아파트 단지 안에 분수대도 만들어지고, 작은 오솔길도 만들어진다. 도시가 새 단장을 한다.

그와 동시에, 그 전에 살던 이들은 보금자리를 비우고 떠나야 했다. 허름한 집이라 싼 값에 세 들어 살던 이들. 또 허름한 집 찾아 둥지를 옮겨야 한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1620년. 말씀대로 살고 싶어 메이플라워호를 탄 사람들. 말씀이 답이 되는 거룩한 사회를 꿈꾼다. 그 열망의 빛이 강해서 말씀이 법이 되는 사회를 이루었다.

거룩한 사회를 꿈꾸다가, 엄격한 사회를 만들었다. 약함이 악함으로 정죄 받는다. 연약한 사람이 완악한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가 짙어진다.

‘엄격한’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주홍 글씨>.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에 쓴 작품이다. 소설 속 시간은 1642년부터 1649년까지 7년간이다. 이 무렵 신대륙의 청교도 사회는 초대교회 성도들 모습보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을 더 닮아있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열망이 넘쳐, 통제와 정죄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찾아온 신대륙.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몰라도, 땅의 일부는 묘지로 정해야 했다. 그런 것처럼 또 다른 일부를 감옥 터로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옥. 그 곳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온다. 두 팔로 갓난아이를 꼭 껴안고 있다. 안긴 아이의 안쪽에 보이는 여인의 옷에는 “A” 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수놓아져 있다.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만든 “A”는 간통이라는 ‘Adultery’의 약자다.

가슴에 “A” 달고 아이 안은 헤스터 프린
전 남편 로저 칠링워스, 의사로 감옥 찾아
갈수록 쇠약해지는 젊은 목사 딤즈데일

‘헤스터 프린’, 그녀는 훨씬 연상인 학자와 결혼해서 먼저 아메리카로 왔다. 남편은 지금까지 하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었다. 곧 따라올 예정이었던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소식마저 없어 배가 난파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동안 그녀는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아이를 낳은 것이다.

가슴에 간통의 “A”를 달고 그 증거인 아이를 안은 채, ‘헤스터 프린’은 교회 옆에 세워진 처형대 위에 올랐다. 그녀에게 내려진 처형은 ‘똑바로 서 있기.’ 헤스터는 감옥에서 나온 오전부터 오후 1시까지 처형대 위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의 갖은 모욕과 조롱, 비수같은 독설을 들으면서.

그때 나이 많은 원로 목사인 존 윌슨 목사가 젊고 존경받는 ‘딤스데일’ 목사를 보며 말했다.

“형제여, 저 여인에게 말 좀 해보시오. 진실을 고백하도록 타일러 보란 말이오!”

윌슨 목사의 종용을 받은 딤스데일 목사가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헤스터 프린, 부디 그대와 함께 죄를 저지르고 고통 받고 있는 그 사내의 이름을 밝혀주시오! 그 사내에 대한 그릇된 동정과 온정 때문에 침묵을 지키지는 마시오. 헤스터, 정말이지 비록 그 사내가 고귀한 자리에서 내려와 치욕의 처형대 위 바로 그대 곁에 서게 될지라도 평생 동안 마음의 죄를 감추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나을 것이오.”

진심이 담긴 젊은 목사의 호소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간통한 여자가 상대 남자를 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헤스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와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던 헤스터 프린에게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를 본 헤스터는 깜짝 놀란다. 찾아온 의사는 바다에서 죽은 줄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그 남자에 대해 묻지 않을테니, 대신 한 가지를 맹세하시오. 누구에게도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리지 마시오. 나는 이곳에서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오.”

감옥에서 나온 헤스터는 주홍글씨 “A”를 달고 살아간다. 처음에는 그녀를 보며 경멸하고 멸시하고, 못되게 굴던 사람들도, 7년의 시간 동안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갓난아이는 ‘펄(진주)’ 이라는 이름의 이쁜 여자 아이가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젊은 목사 ‘딤스데일’은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졌다. 몸이 약해질수록, 그의 설교는 늘 청중의 마음을 울렸다.

강단에서 ‘저는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의 설교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흠 없어 보이는 젊은 목사의 겸손한 자기 반성과 고백에 감동을 받고, 더욱 존경하기 시작했다.

‘딤스데일’, 그가 바로 ‘펄’의 아버지다. 그는 원래 헤스터와 같이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헤스터가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다. 한편으로 스스로 자수하고, 형벌을 받을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러면서 점점 몸이 쇠약해진다.

전 남편, 불륜 대상 눈치채고 죄책감 자극
딤스데일, 떠나기 전날 불륜 고백 후 죽음
세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

헤스터의 전 남편 로저 칠링워스는 ‘딤스데일’이 헤스터의 불륜 대상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자극하며 ‘딤스데일’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런 그의 얼굴은 점점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점점 쇠약해져 가는 딤스데일을 보게 된 헤스터는 그동안 받은 고통이면 충분히 죄값을 치르고도 남았으니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말한다.

도시를 떠나기 전날. ‘딤스데일’은 새 총독 취임식 설교를 맡게 되었다.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한 그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설교를 한다. 더 이상 주눅 들고 쇠약해진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설교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다 마치고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서 나온 딤스데일. 갑자기 옆에 있는 처형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있는 헤스터와 펄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헤스터, 이리 와요!” “내 사랑스런 펄도 이리온!” 펄의 양손을 잡고 세 사람은 나란히 처형대 위에 선다. 그리고 ‘딤스데일’은 죄를 고백한다.

“그동안 저를 사랑해 주신 여러분! 저를 성스럽다고 생각해 주시던 여러분! 이 죄인을 보십시오.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저는 7년 전에 마땅히 섰어야 할 이곳에 섰습니다. 이 무서운 순간 저를 부축해 주고 있는 이 여인과 함께 말입니다.”

그동안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딤스데일. 그렇게 처형대 위에서 자신의 죄를 밝히고,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 사람들에게 조롱 받는 헤스터,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딤스데일, 복수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가는 로저 칠링워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소설은 세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록 “A”라는 주홍 글씨를 달고 살지만 죄를 숨기지 않은 헤스터. 그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독설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살아간다. 오히려 다른 이를 돕는 삶을 선택한다.

주홍 글자
주홍 글자 “A”, 헤스터 삶 통해 의미 변화
딤스데일, 죄 숨겼지만 죄책 숨길 수 못해
칠링워스, 복수 진행하며 자신 영혼 파괴

그런 헤스터를 보며 사람들은 주홍 글자 “A”의 해석을 다르게 한다. 본래의 뜻(Adultery, 간통)이 아니라 ‘Able(능력)’의 “A”라고 말했다. 죄를 드러낸 그녀를 사람들이 용서해주었다.

반면 딤스데일은 점점 쇠약해진다. 헤스터와 달리 그는 자신의 죄를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죄책감에 쌓여 있었다. 그녀는 “A”를 옷에 새겼다면, 그는 “A”를 마음과 심장에 매일 깊이 새기며 쇠약해지고 있었다.

죄를 숨길 수는 있었지만, 죄책은 숨길 수 없었다. 보이는 “A”는 없었지만, 떼어낼 수 없는 더 깊은 “A”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했다. 마지막 고백의 자리에 서기 전까지 그의 삶에 평안은 없었다.

복수를 진행하는 로저 칠링워스. 그는 몸이 쇠약해진 딤스데일을 고쳐준다는 명목으로 딤스데일과 함께 지내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잔인한 모습으로 변한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이 악마의 역할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위인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이루어 가면서, 자신의 영혼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죄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를 볼 수 있었다. ‘헤스터’처럼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회개하는 삶이다.

‘딤스데일’처럼 죄를 인정하지만 외면하는 사람. 회복이 필요한 삶이다.

‘로저 칠링워스’처럼 그 죄에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정죄하는 사람. 자신이 망가지는 삶이다.

이는 로저 칠링워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대륙에 정착해 살아가는 청교도 사회 사람들. 죄를 보며 정죄하기 바쁜 사람들이다. 헤스터가 처음 처형대에 서던 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가볍게 처벌한다 해도 헤스터 프린의 이마빼기에 활활 불타는 낙인을 찍어 맛 좀 보여줘야 해.” “옷가슴이든 이미빼기든 징표와 낙인이 무슨 쓸데없는 소린가? 이 계집은 우리 모두를 망신시켰으니 죽여 버려야 마땅하다니까. 그런 법령이 성경에 들어 있잖아.”

신앙,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뜻 크고 정의 날카로운데, 사랑이 없더라
두 손 들고 오면 거룩, 손가락질하면 거북

옳은 길을 따라가는 것과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신앙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옳은 길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말씀은 다른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한국 사회, 크고 작은 이슈들이 생길 때마다, 교회에서 저마다 소리가 높다. 뜻이 크고, 정의는 날카로운데, 그 속에 사랑이 없다. 소리 높여 정의가 선포되는 곳이라면 응당 회개가 따라와야 하는데 정죄만 남겨져 있다.

옳은 사람이 더 무섭다. 옳은 다수결은 어느새 폭력이 된다. 정의는 먼저 내 삶을 통과하면서 여과되어야 한다. 정의가 죄 많은 내 모습을 통과하고 나면 사랑으로 변한다. 정의가 내 안에서 숙성되면 긍휼로 변한다.

말씀대로 살겠다고 두 손 들고 나오면 거룩한 사람이 되지만, 말씀대로 살라고 손가락질하면 거북한 사람이 된다. 엄격한 말씀, 내게 적용하면 청교도의 삶이 되지만, 엄격한 말씀 네게 적용하면 바리새인의 삶이 된다.

말씀 주신 이유, ‘회개’이지 ‘정죄’ 아니야
정의는 먼저 죄 많은 내 모습을 통과해야
“어째 그랬냐?”보다 “밥 먹었냐?” 묻자

아래는 광주 소명교회 박대영 목사님의 글이다.

자신감이 화근이더라.
단 한 권의 책이 준 안도감이 발단이더라.

오늘은 사랑에 눈 멀고 정의에 눈감게 하더니
내일엔 정의에 환장하여 사랑을 서럽게 하더라.
나를 모르는 못난 사람도, 나만 아는 못된 사람도
그 겸양의 떨림이 증발된 자리에서 피어나더라

천하의 썩을 놈에게도 “어째 그랬냐?”고 묻기 전에
“밥은 먹었냐?”고 물어주는, 사람 같은 사람 되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회개’이지 ‘정죄’가 아니다.

정의가 나를 먼저 통과해야 한다. 그제야 “어째 그랬냐?”보다 “밥은 먹었냐?”라고 묻는 성도다운 성도가 될 것이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