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은 태어나서 수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제 앞가림을 한다. 그때까진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것으로부터, 일어서고 걷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부모의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이에 비해 대개 ‘송아지’나 ‘누(gnu, 영양의 일종)’ 같은 동물들은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걷고 뛴다. 존귀하고 정교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조밀(稠密)하고 세밀(細密)한 성장 과정이 필요하고, 약한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포식자(捕食者)의 공격 대상이 되기에, 자기 보호를 위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 출생인 ‘거듭남(regeneration)’은 오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출생’보다,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는 ‘송아지나 누(gnu)의 출생’에 가깝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을 앞지른다.

그것들은 자력으로 ‘서고 뛰는 것’에 그치지만, 인간은 거듭나는 순간 자기 ‘앞가림’을 넘어 ‘구령(救靈)과 봉사’를 시작한다.

성경에는 그런 사례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아니, 거의 다 그렇다. 예수님의 전도를 받고 갓 믿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했고(요 1:45-49),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그렇게 했고(요 1:40-42), 사마리아 여자가 동네 사람들을 그렇게 했다(요 4:25-30).

이 점이 기독교가 점진적 완성을 꾀하는 다른 수양(修養) 종교와 차별되는 독특성이다. ‘자기 수양(修身)’이 안 된 사람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해선 안 된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는 모든 종교, 윤리가 내건 ‘슬로건’인데, 기독교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기독교는 구령(救靈)을 위시해 모든 봉사에서 ‘자기 완성(修身)’을 전제하지 않는다. 송아지와 누(gnu)가 태어나자마자 ‘냅다’ 달리듯이, 믿자마자 바로 그 일들을 시작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는 ‘자기완성’ 같은 것이 없다.

물론 ‘점진성’을 속성으로 하는 ‘성화(聖化)’가 있지만, 그 용도가 아니다. 구원받은 자답게 거룩해지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 수양 종교의 ‘자기완성’이 아니다. 수양(修養)으로 ‘율법의 완전’을 이룰 수도 없다.

뭇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소위 ‘성자(聖者)’ 같은 완벽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을 목도하며, ‘완전함’의 허구를 본다.

모순되게도, 자서전(自敍傳)이란 ‘그의 사후 타인에 의해 씌어져야 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호흡이 그칠 때까진 안심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시사한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완전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다. 그의 믿음을 보고 완전하지 않은 죄인을 하나님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 ‘믿음’ 역시 대단할 것이 없다. 선물로 주는 구원을 받는 ‘손’일 뿐이다. ‘깨진 쪽박’으로도 물을 떠먹을 수 있듯, ‘깨진 쪽박’ 같은 믿음으로도 구원의 생수를 받아 마실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완전’을 도모할 수 없는 죄인이 ‘다른 사람의 구령(救靈)’을 위해 ‘완전’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언제나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이중적 자아정체’ 속에서 갈등하며 ‘구령’도 ‘봉사’도 한다.

‘자기의 완전’이 아닌 ‘믿음’에 의존하는 기독교 신앙은 근본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절망하는 법도, 그것 때문에 받잡은 소명(召命)을 포기하는 법도 없다.

‘전도자와 구령(복음)’의 관계를 ‘질그릇 속 보배(고후 4:7)’라고 비유한 성경 말씀은 ‘전도자의 정체성’을 잘 표현했다. ‘질그릇’ 같이 볼 품 없는 전도자가 완전한 ‘구원의 복음’을 타인에게 전해 그를 구원시킨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전도자의 불완전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크다는 뜻이다.

전도자는 ‘불완전한 질그릇’인 채로 타인을 구령(救靈)하며, 여전히 ‘볼품없는 질그릇’으로 남는다. ‘질그릇’이 ‘보배’를 담았다고 질그릇 자체가 ‘완전’해지지 않듯, ‘질그릇’이 불완전하다고 그것이 담고 있는 ‘보배’에 흠결을 입히지도 않는다.

죄인 마리아가 ‘하나님 아들’을 잉태했지만 그녀의 흠결이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불완전한 ‘질그릇’이 그 안의 ‘보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의 ‘완전한 보배’가 그를 담은 ‘불완전한 질그릇’을 지켜낸다.

◈사랑은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망각 한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는 ‘하나님 사랑의 강권’이다. ‘구령과 봉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의 강권’이 그 일에 자신을 투신시킨다. 자신의 연약함, 무능에 대한 자각도 ‘사랑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하게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서 동기(動機)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하게 하는 기준은 오직 ‘능력’과 ‘실력’이나, 그리스도인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다.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잊고 하나님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한다.

어미닭은 새끼 병아리를 공격하는 독수리를 향해 무모하게 자신의 몸을 날린다. 오직 새끼를 보호해야겠다는 일념에서이다. 노쇠한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위험을 당할 때, 한줌도 안 되는 능력으로 기꺼이 자식의 방패막이가 되려 한다.

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을 요구받을 때, 자신의 능력, 한계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으로 움직이는 성도는 자신의 ‘능·무능(能無能)’, ‘완전·불완전’에 대한 판단을 거부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에 대한 타인의 판단’은 물론,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도 모두 유보하고(고전 4:3)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 의해 움직였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했던 그의 전력이 그로 하여금 전도자로서의 소명(召命)에 응답하는 것을 멈칫거리지 못하게 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부끄러운 자신의 그런 오점(汚點) 때문에 제자로서의 소명(마 4:19, 요 21:15)에 응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사마리아 여인 역시 그녀의 그늘진 과거 전력이 전도의 장애물이 되게 하질 못했다. 수가(Sychar) 마을 우물가에서 예수님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던 그날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정오 시간(요 4:6)을 택할 만큼 수치감에 절어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을 경험한 후 저돌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제껏 수치심으로 피해 다녔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자기가 먼저 달려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요 4:29)’며 도발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이 그녀의 수치심, 열등감, 소외감 같은 모든 부정적인 자의식을 잊게 한 것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을 받아 도발자가 되어봄이 어떨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