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 극복한 웨슬리, 공부할 필요 충분
예정론 비판하며 ‘공평한 은혜’ 주장한 웨슬리
웨슬리, 생애와 신학 함께 설명해야 이해 가능
▲허천회 목사는 웨슬리의 신학적 사고와 발전을 통해 다음 다섯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①웨슬리 신학을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그의 생애와 함께 이해하는 것이다. ②웨슬리 신학은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발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③웨슬리 신학은 루터·칼빈의 신학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④웨슬리 신학은 다양하게 발전될 필요가 있다 ⑤웨슬리가 전도자요 신학자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한 지역교회 목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이나 선교학에서 탁월한 기여를 했음에도, 지역 교회 목회학으로 발전시키는데 약점이 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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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생애와 신학
허천회 | CLC | 920쪽 | 45,000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1703년 영국 국교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87세로 죽을 때까지 영국 국교회 사제로 살았던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이다. 초기 개혁자들이 가톨릭 신학의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을 태동시킨 사람들이라면, 웨슬리는 그 개혁주의 신학이 200여년을 지나오며 드러난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여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 신학자이다.”
최근 허천회 목사는 10년간의 작업을 마치고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The Life and the Theology of John Wesley)>이라는 두꺼운 저서를 펴냈다. 책을 통해 그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신학의 발전 과정까지 담아내고 있다.
책은 총 7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웨슬리신학 방법론과 자료에 대한 평가’, 2부 ‘웨슬리의 출생과 신학적 배경’, 3부 ‘메도디즘의 태동과 발전: 신성회에서 올더스게이트 체험까지’, 4부 ‘페터레인신도회의 분열과 파운더리신도회의 설립: 갈등과 분열’, 5부 ‘메도디스트 운동의 조직과 성장: 1742-1744년’, 6부 ‘후기 웨슬리신학의 형성과 그에 대한 비판’, 7부 ‘웨슬리신학의 확장과 한계: 아메리칸 감독교회의 탄생,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 동료 목회자들과의 갈등’ 등이다.
허 목사는 “웨슬리의 삶과 신학에 대해 통일된 자료와 출처를 제공하면서 18세기 웨슬리의 삶과 신학에 가깝게 접근하는 일, 더 나아가 현대 신학을 포함해 기독교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며 “오늘날 기독교가 맞고 있는 각종 위기를 극복하고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소임 이상을 완수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허천회 목사는 1983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1987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M.Div.)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낙스 신학교(Knox College in the University of Toronto)에서 신학석사(Th. M.) 및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고, 현재 대학원 겸임교수(Adjunct Professor)로 장로회 신학교에서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2003년 토론토 말씀의교회를 개척해 목회도 병행하고 있다. 다음은 허 목사와의 일문일답.
-장신대 신대원을 나오신 분이 왜 웨슬리를 연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장로교인인 낙스 신학대에서 웨슬리를 가르치고 계신데요.
“성결교 목사로서 장신대에서 공부했을 뿐입니다. 장신대에 들어간 이유는 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 신학의 기반 위에, 루터와 칼빈 신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칼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후에 나온 사람이 존 웨슬리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가톨릭을 개혁했다면, 웨슬리는 개혁신학을 개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와 칼빈 이후 그들을 극복한 웨슬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루터나 칼빈주의에만 빠져 있는 것이 건강하냐’고 낙스 칼리지 학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유학 가서 학위를 마치고, 낙스 칼리지에서 겸임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 최초로 웨슬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곳도 개교 초기라면 동의하지 않았을텐데, 다 병들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칼빈이 우리의 구원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첫 옥외 설교를 하고 있는 존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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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한국에서 알미니안으로 불리고, 이단 소리도 듣습니다.
“(예정론에 의문을 가진) 아르미니우스(Arminius)를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일본과, 세계에서 말하는 일본이 다른 것과 같다고 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말이 다 정답일까요? 아르미니우스를 이단이라고 말하면 정통이 됩니까? 정통이 무엇입니까? 정통, 오소독스(orthodox)라는 말은 그들이 자신에게 붙인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 오소독스(Greek orthodox), 이스턴 오소독스(Eastern orthodox)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옳다’고는 할 수 있지만, ‘우리만 옳다’고 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지요. 신학은 진리의 관점보다는 강조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아요.
아르미니우스는 오리지널 칼빈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정죄를 당했습니다.
칼빈주의의 큰 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인간의 전적 타락 등인데, 구체적으로 아르미니우스는 예정론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했다는 건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판과 구원을 왜 우리가 결정합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알아볼 수 있는 기능까지 빼앗아버리면 인간은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불렀을 때 응답할 기능 정도는 인간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럼 구원을 누가 결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최종적 결정을 인간이 정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인간 없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역할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응답한다고 그것이 죄일까요?
아르미니우스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대화가 통합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가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고 인간에게 주권을 부여했다고 말하면서 이단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갖고 있으시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 인간이 응답할 수 있는 주권을 주셨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능을 주신 것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셨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했다고 본다면,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m·극단적 칼빈주의)라고 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일반 칼빈주의자들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천회 목사는 “웨슬리 신학은 인간의 삶의 상황 안에서 치열하게 발전한 신학이기에 오늘날까지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에 답을 주는 매우 실존적·성경적·창조적 신학”이라며 “한편으로 그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오늘날 반복하는 것이 곧 웨슬리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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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가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해야 했던 시대적 이유가 있었을까요.
“영국 국교회, 성공회 신학이 그랬습니다. 가톨릭은 공로론이었고, 국교회는 가톨릭의 좋은 점과 프로테스탄트의 좋은 점을 조화시킨 신학을 만들어놓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건강하고 최고의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웨슬리였습니다. 당시 극단주의자들은 신인협력설, 인간과 신이 협력해야 구원이 이뤄지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웨슬리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의 경우 구원받을 사람도 있지만, 못 받을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그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용납한다. 그러나 그에게 은총을 주지 않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프리 그레이스(Free Grace)라는 설교를 통해, 정면으로 칼빈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대(소)교리문답>의 루터, <기독교 강요>의 칼빈과 달리, 신학 작품을 남기지 않은 웨슬리가 신학자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웨슬리는 굉장한 신학자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복음전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웨슬리안(Wesleyan)이었습니다. 그 면에서 웨슬리가 너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하는 걸 드러내다 보니, 덜 잘하는 부분은 전혀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웨슬리의 다른 면모들을 알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웨슬리가 어떤 면에서 훌륭한 신학자일까요? 그의 신학은 연구실의 것이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였습니다. 웨슬리는 책으로만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신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웨슬리 신학은 파고들수록 인간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이지 않은 신학을 과연 훌륭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많습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면 훌륭하고,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자유주의일까요? 웨슬리도 이런 입장에 서 있습니다. 가서 들어보니 기도해 주고 싶고 이해도 되어서, 돌아갈 때 격려하면서 지원해 주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런 웨슬리가 잘못한 것일까요? 그는 굉장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더 신학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칼빈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적이어서 신학자적 면모가 덜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웨슬리가 훨씬 더 진지하고 깊은 신학적 문제를 건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웨슬리가 어떤 신학적 문제를 건드렸나요?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철저히 신뢰하다 보면, 예정론이 이론적·성경적으로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현장에서 터득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했습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웨슬리는 ‘회개하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고. 웨슬리는 회개를 강조한 것입니다. 회개를 강조했던 그의 신학은 탁월했습니다.
또 ‘사람이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예정론에 대해, 웨슬리는 그렇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구원받았다고 거룩하게 살다가도 ‘개처럼’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개처럼 살다가도 회개하고 변화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참회반’을 운영했습니다. 신자가 됐지만 다시 타락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칼빈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사람들 아닌가요.”
-오히려 교수님이 칼빈주의를 너무 극단적으로 상정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때 칼빈주의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합니다. 일반적 칼빈주의자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중예정론’은 하나는 구원받고 하나는 심판받았다는 것인데, 웨슬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심판을 받아 구원받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처음부터 정죄했다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을 악한 신으로 만들었다’며 당시 칼빈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물론 설교할 때는 이런 내용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과 모여도 이런 부분들로 논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웨슬리 종합서적’을 펴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말씀드렸듯 웨슬리는 그의 생애와 신학을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웨슬리의 신학은 반드시 그의 생애와 함께 설명해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왜 이런 시도가 없었을까요? 자료가 부족했거나, 신학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한 분야에 치우쳐서 연구하고 쓴 자료들이 많은데, 웨슬리는 삶과 신학을 함께 접해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도 이런 류의 책이 몇 권 있지만, 제가 더 종합을 잘 했다고 봅니다. 이 책처럼 900쪽 가까운 분량은 없었습니다. 제 책은 기왕이면 한 권 안에서 그의 면모를 다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오히려 외국 서적들은 웨슬리 신학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중심으로 그의 삶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신학적 관점에서 웨슬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신학을 풀었습니다. 외국 연구들은 부모나 고향 등을 썼지만, 저는 현대 신학적으로 볼 때 웨슬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었고, 어떤 점에 기여했으며, 어디까지 갔는가를 살폈습니다.
웨슬리 사후 현대 신학이 시작됐는데, 그는 왜 현대 신학의 선구자가 됐는가 하는 것입니다. 배경을 연구하면서, 그런 부분을 열어 놓았습니다. 아주 좋은, 탁월한 신학 교과서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키워드가 ‘생애와 신학을 함께 다룬 것’이라면, 두 번째 키워드는 ‘웨슬리가 개혁신학과 현대신학의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저만의 주장일 수도 있지만, 웨슬리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매우 탁월한 신학 학습이라는 점입니다. 신학과 현장이 유리된 현재의 한국 신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현대 신학은 웨슬리파, 칼빈파, 루터파가 모두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 신학을 해 보면, 루터와 칼빈부터 현대 신학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의 신학은 거의 다 교단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놀랍게도 교단 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전체 신학 전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이 책과 저를 너무 기분 나쁘게 보지 않길 바랍니다. 책에서 저는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웃음).”
-오늘날 한국의 웨슬리 후예들은 루터나 칼빈의 후예들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 한국교회 중 여전히 다수와 주류는 장로교인입니다. 흥미롭게도, 장로교 목회자들이 막상 목회를 웨슬리안처럼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 목회자들 자신이 ‘웨슬리안인지 칼빈주의인지’ 신학적으로 정확히 교육을 받지 못한 측면도 있어 헷갈리고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어딘가에 쉽게 빠지거나 누군가를 쉽게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웨슬리가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개혁신학은 칭의(稱義), 곧 믿음으로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로워진 것이 곧 구원인가요? 개혁신학에 의하면 의로워진 것이 곧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청중들에게, 웨슬리는 ‘칭의가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데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교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성화(聖化)도 있습니다. 칭의 다음에는 반드시 성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화는 칭의 그 이후의 ‘삶’입니다.
그런데 당시 웨슬리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다 불쾌해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거냐, 안 받았다는 거냐?’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구원은 받았지만, 그렇게 믿는 것은 하프-크리스천(half-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구원보다, 조금 더 완벽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올모스트(almost·거의) 크리스천에서, 올투게더(altogether·완전)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웨슬리는 ‘삶과 실천’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습니다. 거룩한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줄 알았는데, 곧잘 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 가운데 그는 소위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Street)에서의 ‘성령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웨슬리는 아주 강력하게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게 됩니다.
웨슬리가 ‘라이프(Life)’를 강조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도덕(moral)이 아닌, 영성(spiritual)을 강조했습니다. 도덕은 영성을 통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론과 복음전도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필드 프리칭(Field Preaching)으로 불리는데, 교회 밖에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이 드러납니다. 처음 말씀드린 회개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데, 본인이 중간에 어떤 도전을 받습니다. 칭의와 성화가 성숙의 과정인지, 결정적 변화가 중간에 찾아오는 것인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는 그 변화를 중생(regeneration, re-born)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이 회개와 중생, 성화. 복음전도였습니다. 웨슬리가 기독교 역사에 끼친 탁월한 영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