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화평하게 평화를 누리며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선물로 주셨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관리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과 탐심으로 반인륜적인 패륜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극에 도달한 세상으로 물들어버렸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낙태가 합법화되고 강간법이 사라지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세상이 되어 성추행과 성폭력이 난무하고,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도 합세해 불법을 저지르는 세상으로 변하여, 억눌린 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되며 병마로부터 신음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길 줄 모르고 갑 질하는 세상으로 변해 버린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는 160여년 전 토마스 목사님이 흘린 피와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값진 피흘리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들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거짓 위선과 불법이 난무하여 도를 넘었습니다.

꿈과 소망이 저물어가며, 서로를 믿지 못하는 거짓과 꼼수가 판을 치는 나라,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할 줄 모르는 지도자들의 심각한 불신으로 나라의 미래는 더욱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1950-1960년대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겨우 생계를 꾸렸지만, 그래도 가족 간에는 끈끈한 정으로 서로 보듬고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불행을 당한 이웃을 찾아가 위로하며 함께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기도 했던 아름다운 시대였습니다.

교회 목사님께서 심방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집안을 깨끗이 정리정돈했습니다. 비록 먹을 것이 없던 시대였지만, 어디서 구했는지 어머니께서 계란이나 고구마를 삶아드리고, 때로는 국수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쌀이 귀한 시절이었지만, 하얀 쌀밥을 지어 대접하기도 하고, 떡을 대접하기도 했던 시절이 따스한 그리움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대접을 받은 목사님께서는 성도들의 집안 형편을 다 아시기에 대접받는 것을 극구 만류하셨지만, 억지로라도 대접하는 그 애틋한 정성을 뿌리칠 수 없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까 애써 참으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목이 메어 기도하시는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귓전에 다가와, 마음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입이라도 하나 떼어놓으려고, 사랑하는 자식을 친척집으로 보내는 부모의 그 쓰라린 심정을 이루 형언할 길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공부를 제대로 시킬 수 없어, 큰 딸이나 둘째 딸은 취업전선인 공장으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남동생 뒷바라지는 그들의 몫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생에 있어 아주 귀한 젊음의 시간들을 희생했던 뼈아픈 추억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70-8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이 시대를 한탄하며, 자식들이 보지 않는 구석에 앉아 시대의 참상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저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배가 고팠어도 이웃의 것을 탐내거나 도둑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법도 잊지 않았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면, 어르신들께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일러주시던 그 때가 너무 그립습니다.

지금처럼 이웃 어른들이나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참혹했던 6,25 동란을 거치면서 굶주림에서 탈피하고자, 새마을 사업을 시작으로 국가 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열심히 땀 흘려 일했던 우리들입니다. 산업전선에 나가 밤을 꼬박 새워 가면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당시 야간 수당과 철야 수당은 꿈조차 못 꾸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가정의 행복을 위한다는 목표 하나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근무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합니다.

그리고 1960-1970년대에는 나라의 엘리트라는 분들이 머나먼 이국 땅, 독일로 가서 간호사와 광부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고국으로 보내었습니다. 그 돈은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바뀌게 한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20대 젊음을 머나먼 타국의 땅 월남 전쟁에 참여해 부상을 입으며, 심지어 고귀한 목숨까지 바쳤던 그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 부흥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의 값진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데, 이 시대 젊은이들이 그 희생을 모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툭하면 노동운동이다 해서 임금과 시간을 운운하며 수시로 파업을 함으로써 회사나 국가 경제에 걸림돌을 자행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아~ 배가 불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지난날 연신 피·땀·눈물을 흘리며 경제를 살렸던 우리 시대가 어쩌면 저들을 게으르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현재 나라에서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어쩜 예견됐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 부처에서는 각자 맡은 사명을 소신있게 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자신이 지명한 각 부처 수장들을 믿고 일을 맡겨야 옳음에도 부처에서 할 일들을 다 해 버려, 부처에서는 할 일이 없게 됩니다. 그저 통수권자 눈치만 보면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각 부처를 없애고 청와대에서 다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참혹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고집과 교만 때문에 국민들의 편가르기는 더욱 심해집니다. 함께 소통하며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골몰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과 함께 하는 당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합니다.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욕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니, 세계인들 보기에도 심히 민망할 따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아브라함의 친척 롯의 가족은 물론이고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6번씩이나 약속을 변경하면서까지 간구를 합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노여움을 각오하고 건의하는 아브라함, 소신 있는 충직한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가 배워야 할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6번씩이나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중심 있는 긍휼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건의를 수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올바른 판단과 정직함을 보시고 건의를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교만으로 인한 향락과 타락한 죄의 본성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심한 나머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던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결말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은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실천하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하며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지켜냈던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시절 뜨겁게 지폈던 인간성과 믿음을 회복하며,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이 나라의 신앙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부어주셔서, 이 시대에 이 백성을 구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