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세우는 기초이다(마 16:18). 교회는 이 복음 위에 건설되고, 복음에 의해 그 정체성이 견인(堅忍)된다.

만일 교회가 복음으로 견인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단한 것을 성취한다 해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 복음을 설교하도록 늘 성령으로부터 소명(召命)받는다. 교회가 이 일을 소홀히 하고 다른 것에 주목하는 것은 일종의 배교(背敎)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계 2:29)’이란 어떤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령의 전권을 위탁받은 특별한 은사자가 ‘시대의 은밀한 비의(秘意)를 교회에 들려준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이 감독자로 세운(행 20:28) 설교자들을 통해 ‘복음’을 교회에 들려준다는 뜻이다.

◈복음은 ‘현실 타개책’인가? ‘현실 타개력’인가?

복음은 교회 건설의 기초이며,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대개 후자(後者)는 사람들에게서 간과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구원은 주지만 현실을 타개(打開)하게 하는 힘은 못 된다고 여겨, 복음을 ‘교회 안의 고백’으로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설교자들을 향해 초월적인 복음 대신,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실재적 대안들을 설교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순되게 ‘성경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다’며,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는 정작 복음은 거기에서 제외시킨다. 초월적인 복음 외에, 모든 성경은 현실에 유용하다는 뜻일 게다. 난센스이다. 정작 복음이 삶의 능력인데 말이다. 어떻든 넓은 의미에서 ‘성경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다’는 그들의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모든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세세히 다 코치해 준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토정비결(土亭秘訣)이나 주역(周易)같이 되고 만다. ‘성경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다’는 말은 복음이 주는 ‘현실 타개력(Realization ability)’을 말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는 말 역시 해석상 주의를 요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으면 뭐든 다 할 수 있고,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현실 타개책(a realistic solution)’을 갖는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성도들이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삶의 장벽을 만났을 때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대 일의 맞춤식 ‘타개책(a realistic solution)’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돌파할 ‘타개력(Realization ability)’을 준다는 말이다.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고후 4:8),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염려(빌 4:6), 믿음을 지키다가 오는 시련(히 11:33-38).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창 39:12-20) 실족하여 넘어졌을 때(마 26:69-75) 복음이 그것들을 타개하도록 해 준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의 타개력은 문제 해결에 있어 점괘(占卦)처럼 하나하나의 비책을 제시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냥 복음을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현실 타개력’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사도 요한도 그것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을 뿐, 거기에 대한 세세한 언급이 없다(요일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이런 점에서 ‘복음’은 전천후 해결책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고후 2:2)”은 복음이 죄인을 구원하고 유일한 길이고, 세상을 이기는 전천후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한 잇따른 그의 말에서도, ‘복음 신앙’이 그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원천임이 고백되고 있다.

복음이 성도에게 능력이 되게 하는 과정은 이렇다.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이 성도 안에서 믿음, 인내, 기도, 사랑, 소망, 분별력, 용기, 능력을 일으키고 때론 환경의 변화를 이끌어 그에게 승리를 견인시킨다.

그 결과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는(히 11:33)” 일들이 일어난다.

‘음부의 권세(사단)’를 이기는 유일한 능력 역시 ‘복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한 것은 로마교회가 주장하듯, “음부의 권세가 ’로마 천주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교회지상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흔히 영적 능력 하면, 특별한 ‘은사’들을 떠올리지만, 사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것을 믿는 ‘믿음’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천국까지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복음)’

‘복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마 16:19)일 뿐더러, 성도가 천국에 다다르기 까지 그들에게 쉼 없이 들려지는 ‘목자의 음성(요 10:4)’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끄실 때, 다만 천국 열쇠만 주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목자의 음성(복음)’을 들려주며 끝까지 그들을 이끄신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약한 양(羊)의 속성을 아는 목자가 그들에게 천국 열쇄만 쥐어주고, “실패없이 꼭 천국에 입성하라. 위기를 만날 땐 내게 SOS를 쳐”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개념과 배치된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 10:4)”라는 말씀대로, 목자인 그리스도는 자기 양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신 후, 천국에 다다를 때까지 쉼없이 그의 음성(복음)을 들려주며 그들을 이끄신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복음)’을 듣고 죽기 살기로 그를 따른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따르다 보면 어느새 천국 문에 들어선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성도를 천국으로 들이시는 방법이다.

“저희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도록 하신다(시 84:7)”는 말씀은 양이 쉼없이 ‘목자의 음성(복음)’을 듣고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천국에 이른다는 의미다. 성도가 쉼 없이 ‘복음’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복음에 성도가 끌리는 것은 성도 안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게 하는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음의 증거자’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들은 그들에게 ‘목자의 음성(복음)’이 들릴 때 복음에 매료되고, ‘목자의 음성(복음)’이 아닌 소리에는 도망친다(요 10:5).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양(羊)의 속성이다.

반면 거듭나지 않아 성령이 없는 이들에게는 ‘목자의 음성(복음)’을 들을 귀가 없기에 그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한 기준이 된다.

쉼 없이 ‘목자의 음성(복음)’을 듣는 양(羊)들은 복되다. 그것을 통해 그들의 영혼이 날마다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받으며 모든 세상의 시험과 장애물에서 건짐을 받으며 기어코 천국에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至難)한 코로나19 형국을 극복할 힘도 매일 ‘목자의 음성(복음)’을 듣는데 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