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혈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한 사순절,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모습. ⓒ크투 DB
본문: 로마서 8장 17-18절


고난은 인생의 필수과목이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선택과목과 필수과목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선택과목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과목이고 필수과목은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과목입니다. 필수과목은 내가 듣기 싫다고 해서 듣지 않아도 되는 과목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과목입니다. 왜냐하면 필수과목을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도 선택과목이 있고 필수과목입니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이수해야 할 필수과목 중 하나가 바로 고난이라는 과목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원망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속도로와 같은 인생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고난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애굽땅을 나온 이후에 가나안땅까지 쉽게 갈 줄로 기대했습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애굽 땅을 나오자마자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이들을 죽이기 위해 쫓아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 가운데 놓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세를 찾아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하는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홍해 사건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들은 어려움만 만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난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필수과목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2:29)”.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체험 종교입니다. 우리는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예수님이 머리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믿어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바울은 그냥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어느 누구 하나 고난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고난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고난의 강도와 횟수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땅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인간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셨습니다.

자신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믿었던 제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난도 당하지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고난이 필수과목이라면 우리는 이 고난을 잘 이겨나가야 합니다.

고난의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난의 현장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그런 경험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그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함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그 예배를 우리는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저희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는데 대구 사람이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마지막 날 장지에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고난 앞에 마음이 많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이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고난이라면, 우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고난을 고난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고난 자체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고난 자체로만 바라보면 너무 힘들어집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게 됩니다. 불평하게 됩니다. 소망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그 자체만을 우리가 바라보면 마음이 너무나 힘듭니다. 누군가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과연 이 상황이 끝나게 될 까라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둘째, 고난의 뒷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의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다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앞면만 보면 힘든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뒷면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고난의 뒷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뒷면에는 무엇이 있을 까요?

고난의 뒷면에는 영광이 있다

첫째, 고난의 뒷면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고난의 뒷면에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 Yes, 고난 No

사람들은 누구나 영광을 누리를 원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 받기는 싫어하면서, 영광만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세 번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각인시키셨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청탁을 하였습니다. 오늘날만 치맛바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절 때도 이미 치마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한 아들은 주의 우편에, 한 아들은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곧 주님이 이스라엘을 로마 가운데서 해방시키고 왕이 되시면 아들 하나는 우의정에 하나는 좌의정에 앉혀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 가운데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고난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고 자기들과 상관 없는 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고난은 주님 홀로 받으시고, 영광은 저희와 함께 누리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이 은연중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은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기회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영광을 볼 수 있으면 고난을 이긴다

성경은 영광을 누리기 전에, 먼저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이 먼저가 아니라 고난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저들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을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어리석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뒤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에 고난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주님께서는 주님 때문에 박해를 당하면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이 어떻게 복입니까? 박해를 당하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나 영광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뒷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고난을 견디고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뒷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둘째, 고난의 뒷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의미 없이 고난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원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는 뜻을 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19로 인해 일어나는 이 위기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은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대구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대구 땅은 초창기 복음이 들어왔을 때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칭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복음의 불모지’로, ‘목회자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 신천지 대구 다대오지파가 신천지 가운데서도 가장 급성장하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지도자들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고난은 연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우리를 연단시키시기 위해 주시는 고난은 우리가 잘 통과해야 합니다. 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은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흔들어 괴롭게 하고 그 힘줄과 뼈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한다.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그 능력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또한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트레이너인 신이 당신을 최후의 승자로 만들기 위해 아주 어려운 상대와 연습게임을 하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하라.”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인간은 고난을 통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주시는 고난의 뒷면에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강한 하나님의 군사로 만들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을 주시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고난을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송병주 목사님이 쓰신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한 어머니의 눈물어린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청년 시절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데, 첫 번째 아이가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아이뿐만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아이도 모두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평생을 장애로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눈물로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지며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세 명의 중증장애아를 자녀로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주이고 징벌입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하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 가운데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미안하구나, 내 딸아. 이 세상에 꼭 보내야 할 연약한 세 영혼이 있었는데, 너라면 잘 맡아줄 것 같아서 네게 보냈다. 네게는 참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잘 부탁한다.”

그녀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통곡하고 감사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해주셔서, 날 신뢰해주셔서, 이 땅에 꼭 와야 했던 세 천사들을 선물로 주셨구나.’

몰약은 으깨지고 터질수록 짙은 향기를 냅니다. 포도주도 포도를 으깨서 강하게 짤수록 더욱 검붉은 빛깔을 내고 깊은 맛을 품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향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뒷면에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뒷면에는 유익이 있다

셋째, 고난의 뒷면에는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시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시인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시인이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처음 고난을 당할 때는 아마 시인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고난 자체는 분명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시인은 “고난이 유익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딤플이 더 멀리 날아가게 한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대부분 몸체가 유선형이고 표면이 매끄럽습니다. 비행기의 표면이 울퉁불퉁하면 더 많은 공기 저항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뿐 아니라 공기 중에 빠른 속도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들은 대부분 매끈한 표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더 멀리 날려 보낼 목적으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수많은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골프공입니다. 골프공을 보시면 수많은 홈이 있는데, 이를 ‘딤플’이라고 합니다.

초창기 골프공은 당연히 공기 저항을 줄여야 멀리 날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딤플이 공기 저항을 2배로 줄여서 골프공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지금 그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분명히 힘들지만, 이 고난을 우리가 잘 극복해 나갈 때 매끄러운 골프공보다 울퉁불퉁한 골프공이 더 멀리 날아가듯이 우리도 더 멀리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더 강하게 만든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 또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고난에 처하게 만든 문제는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더욱 비옥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고대 그리스의 뛰어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 안에 조약돌을 넣고 시를 낭송하고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치는 부단한 연습 끝에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마르트부르크 성에 갇혀있던 시기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작곡가 베토벤의 가장 훌륭한 교향곡은 청각장애인 된 이후에 작곡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 있는 동안 ‘천로역정’을 썼고, 다니엘 디포 역시 감옥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의 재임기간이 남북전쟁 때가 아니었다면, 최고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뒷면을 묵상하라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1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 36년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아픔의 역사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있었기에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사순절이지만, 어느 때보다 특별한 사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이미 고난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난 자체만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뒷면을 묵상해야 합니다. 고난의 뒷면에 있는 영광을 묵상해야 합니다. 고난의 뒷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유익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