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 질병, 세균, 우한폐렴
▲코로나19 바이러스 ⓒ픽사베이
근자에 읽은 글 가운데 인상 깊었던 내용 중 ‘사소한 구원’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전직 작가였던 어느 기자의 글 속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기독교와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작금의 ‘코로나 형국(形局)’과 결부되며 뇌리를 때린다.

곧 ‘죄와 지옥에서의 구원’같은 ‘큰 구원(a great salvation, 히 2:3)’ 말고, 피부에 와 닿는 코로나19(COVID-19) 퇴치와 같은 ‘사소한 구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구원 개념’이 아닐까 싶다.

‘큰 구원’은 미지의 일로 멀리 보이고, ‘사소한 구원’은 그들의 일상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감사라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죄와 멸망에서의 ‘큰 구원’보다 일상의 ‘사소한 구원’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 불평과 원망도 주로 그런 것 때문이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들의 광야 여정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하나님이 유월절(逾越節) 어린 양의 피로 지긋지긋한 400년 노예생활을 종식시켜 주셨으니 평생 구원에 대한 찬양의 념(念)으로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애굽의 10재앙, 어린 양의 피의 유월(逾越), 홍해를 가르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켜 얻은 엄청난 구원은 이미 그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다.

현재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애굽에서 즐겨먹었던 고기,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민 11:4-5)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음에 있었고, 그로 인한 불평과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그것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울었다(민 11:20). 기가 막힐 노릇이다.

가나안 입성 후, 이웃한 바벨론, 블레셋, 앗수르, 모압, 암몬 같은 나라들이 섬기는 신(神)들에 곁눈질했던 것도 그것들이 자기들의 소소한 욕망 곧, ‘사소한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는 드라빔(삿 17:5), 농업을 관장하는 바알, 풍요를 안겨주는 다곤(삼상 5:2), 사냥의 행운을 지배하는 네르갈(왕하 17:30), 백성의 수호자 므로닥(렘 50:2), 학문의 신 느보(사 46:1).

우상의 이름들에서 나타나듯, 그것들은 일상의 소소한 필요를 채워주는 현세에 유용한 신(神)들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맞춤식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듯 하나님은 ‘큰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사소한 구원’엔 무관심한 그런 분이 아니셨다. 그는 창조주로서 그의 모든 피조물의 생존을 책임지신다.

무죄했던 에덴(Eden)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 후에도 변함이 없으시다. 인간들 뿐 만 아니라, 미물인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까지 그는 먹이고 입히신다.

출애굽 후, 광야 노정기 자급자족할 수 없는 비상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생수를 흘려내셨다.

그뿐인가? 솔로몬이 성전 완공 후 올려 진 기도에서 보듯, 기근, 전염병, 병충해, 전쟁, 재앙, 질병에서도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셨다(왕상 8:37).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다양한 현실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병든 자에게는 치유를, 배고픈 자들에게는 빵을 제공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보다 중한 ‘큰 구원(a great salvation, 히 2:3)’이 있음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그것을 주시기를 더 기뻐하셨다.

택자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반드시 그 ‘큰 구원’과 결부되어 행사됐다. 그들 육신의 ‘생사화복’도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사됐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선순위를 ‘큰 구원’에 두신 것이다.

뭐든 요구할 때마다 직방으로 도움을 준다는 이방 신(神)들과는 달리, 그의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즉문즉답(卽問卽答)’ 식으로 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에 야박하고 인색한 듯 했다. 주어도 한참 애를 달군 후에 주시고, 겨우 입에 풀칠 할 정도로 주셨다.

때론 준 것을 도로 빼앗기도 했고, 아예 묵묵부답이기도 하셨다. 이는 다 그 ‘큰 구원(a great salvation, 히 2:3)’과 연관된다.

이런 그의 태도가 때론 그들에겐 좌절의 빌미가 됐지만, 하나님은 무엇이 그의 자녀들에게 궁극적인 선이고 유익이며, 그들의 영혼에 유․불리(有不利)한가를 꼼꼼히 따져 모든 것을 경륜하셨다.

성령이 대신 간구해 주셔야 할(롬 8:26) 정도로, 엉뚱한 것을 구하고(마 20:20-22) 정욕으로 쓸려고 잘못 구하는(약 4:3), 본능에 충실한 그의 자녀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간혹 막무가내로 졸라 어쩔 수 없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경우에도, 결코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들의 영혼은 마치 상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파리해졌다(시 106:15). 인간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다고 다 좋아할 것도, 그렇지 못했다고 낙심할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겪는 고난도 그렇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할 땐, 그들을 향한 그의 거룩한 계획과 목적이 있는데(롬 5:3-4),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무조건 피하려는 인간의 육적인 본능대로 다 들어주신다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성취될 수 없다.

의롭고 순전한 욥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친 것이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치유를 위해 드린 기도가 묵살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과 그들의 궁극적인 유익을 따져 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불행해 보일지 모르나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과 ‘큰 구원’에선 결코 그렇지 않다.

◈삼위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는 계시적인 의미가 함의됨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만 아니라 그의 모든 행위, 예컨대 창조, 구원, 종말, 심판 등 그의 모든 행위를 통해 그의 영원한 목적과 뜻을 계시하신다.

대개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문제 해결 장면을 보면, 그 문맥의 정황 속에서만 그것을 파악하여 단지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없애주시는 분이며, 그것을 통해 그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당시의 ‘정황적 의미’를 넘어 ‘계시적 의미’,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낸다.

다만 당시의 정황에만 초점을 맞춰 성경을 읽는다면 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성경읽기에 신학적 통찰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위가 ‘계시적’임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그것들이 반복하여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곧 계시의 완성으로 더 이상 ‘이적(miracles)’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Revelation behavior)’가 필요치 않게 된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이적이 없다는 ‘이적 종식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계시’로서의 이적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비상 섭리’로서의 초자연적인 이적은 지금도 계속된다).

하나님의 2위(位)이신 성자 예수님의 삶, 언행, 존재 자체도 모두 ‘계시(revelationa)’였다. 그가 선지자로 호칭된 것도(신 18:15) 이 때문이다. 성육신 전에는 말씀으로 계시하셨고, 성육신 이후엔 그의 가르침, 치유, 이적, 전도 등 그의 모든 행위가 다 계시였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죄인의 비참한 실상. 그리고 자신은 그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문둥병 치유를 통해 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적 타락한 인간과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소경의 눈을 띠우신 것을 통해 죄로 소경된 죄인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심을.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며 인류 택자가 그를 먹으므로 영생 얻음을 계시했다.

이 예수님의 ‘행위 계시(deed revelation)’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2)”는 성경 말씀의 성취이다.

코로나19 형국을 맞아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것의 퇴치를 간절히 염원한다. 어쩌면 지금은 ‘큰 구원(a great salvation, 히 2:3)’보다 ‘사소한 구원’이 필요한 때이다.

다윗 시대, 고라 자손의 반역으로 이스라엘에 전염병(the plague)이 창궐해 14.700명이 죽어나갔을 때, 속죄로 역병이 물러갔듯(민 16:48) 지금 그런 은혜가 임하길 기도한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하나님은 ‘사소한 구원(?)’은 잠시 유보한 채, 아니 ‘사소한 구원의 유보’를 통해 그의 교회와 택자의 ‘큰 구원’에 몰두하실지 모른다.

이유는 모른다. 거기에 어떤 하나님의 은밀 섭리가 있는지. 아니면 혹, 우리의 죄 때문인지.

오직 그의 주권적 섭리를 존중하며, 인내 속에서 그의 자비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옷깃을 여미며, ‘사소한 구원(?)’을 요청해 본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이 코로나19 형국이 빨리 지나가게 하소서.” 할렐루야!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