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건축학에서부터 물리학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을 기술하기 위해 느슨하게 사용되는 정치적 신념이자 용어다. 이는 현대 21세기 사회에 대두되고 있다. 이 용어는 관점에 따라 모호하며, 방대한 입장과 현상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된다. 그래서 환원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현재 이 용어는 신학이나 기독교적 관행에서 단순히 ‘현대적 도깨비’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성격을 가진 ‘보편적 이성 개념’에 대해 거부하는데,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것을 거부한다. 즉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은 연역법적인 성격이 강하고,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귀납법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이데거, 가다머, 자크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 따르면 모든 지식에는 선입견, 즉 가상의 보편 명제가 깔려 있고, 이는 특히 서구적 사회·문화·역사로부터 기인된 것이기에 “보편적이고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은 불가능한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 담론을 향한 의심”이라고 정의하면서, 보편적이고 자율적인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를 근거로 삼는 세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이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이야기나 신화와 유사한 기초 담론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인들에게 빠르게 퍼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수많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서구 문명의 구조들을 전면 부정한다. 자크데리다는 해체주의를 제시한 철학자로 유명한데, 그는 서구 문명을 ‘가부장제’라 하고 ‘팰러스 로고스 중심주의’라 정의했다. 여기서 팰러스(phallus)는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서구 문명을 남성의 지배에 의한 결과이며 억압적이고 실속만 챙기는 집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까지 달려온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숭고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캐나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만연한, 치명적인 허무주의”라 정의한다. 허무주의, 즉 감사함 없이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분명 잘못된 것이다. 물론 21세기 사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비교했을 때 당연히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땠는가?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기 전 조선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나라였다. 임금의 전화를 큰 절 올리고 받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당연시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이토록 서구, 특히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많은 기적들을 이루어 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부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인류의 개인적인 정체성을 부정하고, 근본적인 정체성이 일종의 집단에 의해 조성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기본적으로 특정한 인종들의 표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인의 특권, 여성의 특권(페미니즘), 동성애자의 특권, 또한 민족성의 표본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이들을 압제자에 대항하기 위해 피해자의 입장에 놓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묘한 속임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부르주아와 프톨레타리아의 전쟁터라고 정의한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투쟁, 흑인과 백인의 투쟁, 동양인과 서양인의 투쟁,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 등 그저 권력을 위한 투쟁만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진리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말씀을 전면 부정하는 셈이다. 그들에게는 관용과 사랑이 없다.

그들은 로고스(logos)마저 부정한다. 로고스는 모든 실재에 부여되는 우주의 원리라 정의된다. 우주는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이지만, 로고스는 이러한 측면의 근저에서 통일성과 합리성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이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여기서 ‘말씀’이 바로 로고스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 배후에 있는 질서의 원리이자 창조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절대적 진리와 질서를 거부한다. 그들은 질서보다 혼돈 그 자체를 추구한다. 아담과 하와는 질서와 혼돈을 상징한다. 하와는 뱀(사탄)에게 꾐을 당해 인류의 첫 번째 혼돈인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지르고, 이는 질서의 상징인 아담에게도 이르러 모든 인류 후손들에게도 죄를 부여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죄로부터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로고스이자 창조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문명을 가부장적인 압제 제도로 분류하여 부정하고, 모든 인류를 정체성 집단으로 가정하여 그것들의 전쟁을 부추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질서를 부정하고 혼돈 그 자체를 추구한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관용이 없다. 권력을 위한 투쟁만 있을 뿐이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각성해야 할 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를 억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동성애와 같은 ‘틀린’ 것들을 그저 ‘다르다’고 말한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의 시선으로 비난받고,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인이라는 타이틀에 휩싸인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동민
세종대학교에서 체육학과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기독교 보수주의 청년단체 <트루스포럼>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