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 박문재 역 | 현대지성 | 336쪽 | 11,500원

모든 것 할 수 있다 말하는 게 용기 아냐
내가 할 수 없는 것 인정하는 것이 용기
‘지혜’, 많이 아는 것 아닌 ‘무지’ 아는 것

육해공. 삼군 참모총장들이 모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병사 자랑으로 이어졌다.

해군참모총장이 해군 병사를 불러다 지시를 내렸다. “깃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양손으로 경례를 하라.” 해군 병사는 참모총장의 말대로 깃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더니, 위험하게 서서 경례를 했다.

그 모습을 본 공군참모총장은 공군 병사를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깃대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 양손으로 경례를 하고 멋지게 뛰어내리라.” 공군 병사는 시키는 대로 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착지한 후, 병원으로 이송됐다.

마지막으로 육군참모총장은 지나가는 병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완전 무장을 하고 깃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양손으로 경례를 하라.”

그 말을 들은 병사는 육군참모총장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제정신이 아니군요! 제대로 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육군참모총장은 두 참모 총장을 보며 말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다. 지혜도 그렇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 믿지 않고 젊은이들 현혹 죄목으로 고발
소크라테스, 무죄 위해 ‘델포이 신’ 증인 요청
나는 무지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모르더라

<소크라테스의 변명>. 좀 더 정확한 의미의 번역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재판에서, 그가 했던 변론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재판 현장에 있었던 플라톤이 기록했다.

이 책은 세 차례의 변론이 나온다. 1차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단하는 재판에서의 변론이다. 2차 변론은 유죄 판결을 받은 다음에 한 변론이다. 소크라테스는 1차 변론 후 유죄가 선고되었다.

아테네의 재판 절차는 유죄가 선고된 다음 형량을 결정한다. 유죄가 결정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사형이라는 형량에 대해 변론한 것이 2차 변론이다. 3차 변론은 사형이 선언된 후에 한 최후 변론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으며, 젊은이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이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델포이 신’을 증인으로 요청한다.

“나는 델포이 신을 증인으로 신청하고자 합니다. 제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신탁을 구했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그러자 델포이 신전에서 내려온 신탁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씀입니까? 내게는 큰 지혜가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작은 지혜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지혜롭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대화했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는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자기가 지혜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다.

공자도 논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是知也(시지야): 이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기독교인, 한계 인정하는 지혜로운 사람들
가장 나약해 보이지만, 나약함 인정하기에
진짜 강한 사람… 나약함 아닌 지혜로운 것
구원도 내 힘으로 받을 수 없어… 십자가로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나약하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는다. 기독교인들은 나약하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선택하려고 하지 않고, 성경에만 의존하려 한다. 기독교인들은 나약하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알려주는 길로만 가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강하다. 스스로 나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내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이다.

성도는 구원을 내 힘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을 경험한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내 연약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지혜다. 그것이 믿음이다.

소크라테스, 불의한 재판에도 삶 후회 않아
사형 구형된 뒤에도 사명감 흔들리지 않아
선처 구걸하지도, 벌금형 제안하지도 않아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겠지요. ‘소크라테스여, 우리에게서 떠나 조용히 편안한 삶을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께 불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죽이겠다고 백 번이나 경고할지라도, 나는 앞에서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은 신이 준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신의 사명을 말(馬)과 등에(짐승의 피를 빠는 곤충)에 비유한다.

“이 나라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데다가 힘이 있긴 하지만 몸집이 크고 둔하여 등에를 붙여 정신이 번쩍 나게 해야 하는 말(馬) 같습니다.

신께서는 나 같은 사람에게 등에의 역할을 하라고 이 나라에 꼭 붙여 놓으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옆에 꼭 붙어서 종일 끊임없이 설득하고 책망하여 정신이 번쩍 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감은 사형이 구형된 뒤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테네의 재판은 유·무죄가 결정되면, 형량을 선언하는 재판이 이어진다. 이때 원고가 원하는 형량을 제안하고, 다시 피고가 자신이 원하는 형량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도둑에게 훔친 물건의 10배의 벌금을 원고가 구형할 수 있다. 이때 도둑은 그 형량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원하는 형량을 제시할 수 있다. ‘저는 5배의 벌금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변론한다. 그 변론을 다 들은 배심원들은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게 된다. 원고가 제시한 10배의 벌금이든지, 도둑이 말한 5배의 벌금 둘 중의 하나를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유죄가 결정된 후 원고가 사형을 제시하면, 피고는 선처를 바라면서 사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피고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 30므나의 벌금형을 제시했다. 그러면 배심원들이 사형 대신 벌금형에 손을 들어 준다. (1므나는 1드라크마, 1드라크마는 장정의 하루 품삯. 30므나는 10년 연봉의 금액이다.)

사형을 구형받은 소크라테스. 그는 사형을 피하기 위해 선처를 구걸하지도, 벌금형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벌금이 아닌 포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실제로 한 일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받는다면 그것은 상(賞)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국가 유공자 대우를 해달라고 말한다. 자신이 한 행동이 끝까지 옳은 행동이었음을 주장했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십자가. ⓒpixabay
소크라테스의 당당함에서 떠오르는 ‘바울’
하나님 주신 사명이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사후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당당

소크라테스의 이런 당당함에서 바울의 모습이 보인다.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 그곳에 가면 붙잡히고,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여정을 수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았다. 사명의 길은 고난과 닿아있다. 한달음에 내달리기에는 장애물도 많고 비좁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 망설일 수는 있어도 끝내는 통과하고야 만다.

2차 변론을 마치고 사형이 결정된 소크라테스. 그는 최후 변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비겁함을 피하는 것입니다. 비겁함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진 소크라테스. 그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재판 현장을 찾아온 자신의 제자들을 보았다. 그들 때문인지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죽음이 좋은 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소멸해버리는 것이거나, 영혼이 저승으로 옮겨 살게 되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소멸의 경우, 꿈도 꾸지 않는 잠과 같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평안입니다. 또한 영혼이 저승으로 옮겨간다면, 거기서 죽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영웅들과 현자들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사후 세계는 확신이 아니라 예상이다. 본인도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말한다. 그는 사후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도 죽음 앞에 당당했다. 소신있는 선택을 했다.

그리스도인, 죽음 이후가 선명한 사람
막연한 기대 아닌, 약속된 부활의 소망
비록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 승리

성도는 죽음 이후가 선명한 사람이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분명한 소망이다. 성도는 ‘부활’이 약속된 사람이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말한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아픔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도 죽음 보다 크지 않다. 성도는 그 죽음도 이긴 부활이 약속된 사람이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산다. 비록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선다. 부활의 소망 가지고, 오늘을 승리로 만드는 사람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5-58)”.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는 세 번의 변론에서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사명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최후 변론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의 안락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복음 성가 가사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믿음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고백이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