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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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성경들 해석은 기독교의 전유물인가?

성경 고고학자들은 유대교,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 콥트교, 프로테스탄트, 이슬람 등 다양한 신앙적인 배경을 가진다.

따라서 이들 학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고고학적 발견 그리고 토라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다양한 역본들 사이에서 서로 간에 해석의 단절 현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의 경우 바로 필자가 지적한 에덴동산 추방과 창세기 대홍수 사건과 바벨탑 언어 혼잡이라는 3가지 결정적 사건 외에도, 창세기 1장이 가지는 창조라는 초월적 대사건에 대해 비교적 단순하고 용이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어 창세기 1장 해석의 모호성을 가지게 만든다.

창세기 1장을 포함한 11장까지를 서론에서 ‘원역사’라 부른다고 했으나, 창세기를 포함하여 오경 전체 역사가 하나님이 구속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처음 11장의 역사를 원역사보다는 태고사(太古史)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신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개신교 신학의 주된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토라가 개신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MIT 박사 출신의 물리학 교수요 이스라엘의 핵심 학교들인 와이즈만 연구소, 히브리대학, 볼카니 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랍비 교육까지 필한 제럴드 슈뢰더(Gerald L. Schroeder)의 해석학적 제언에서 잘 드러난다.

슈뢰더의 명성은 1923년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옥스퍼드를 나와 킬 대학(20년), 옥스퍼드, 에버딘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와 여러 직책을 맡으며 50년 동안 무신론 철학자로 악명(?)을 떨치던 안토니 플루(Antony Flew) 교수가 슈뢰더의 『The Hidden Face of God(번역명 ‘신의 숨겨진 얼굴’)』을 읽고 회심하였다는 고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슈뢰더는 중세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의 글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성경 사이의 갈등은 과학적 지식의 결핍과 성경에 대한 완전치 못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The Science of God, New York: Free Press, 1997, 3). 이것이 지속적인 불협화음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성경들(히브리어 다양한 사본들, 아람어 탈굼, 불가타역, 칠십인역 성경, KJV, 각 나라 역본 등) 사이에서 창세기 1장 1절의 해석부터 어긋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런 관점에서 슈뢰더는 우리 기독교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번역한 것 자체가, 진정한 히브리어 성경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슈뢰더는 기독교의 중요한 세 가지 번역(헬라어, 라틴, 영어) 성경에서 찾는다. 먼저 4세기경 제롬의 라틴 불가타 성경(Latin Vulgate)과 오경을 제외하면 주로 주전 2-3세기에 번역된 것으로 알려진 헬라어 70인역(Septuagint), 그리고 70인역을 기본으로 1611년 간행된 킹제임스 흠정역(KJV)이라고 지적한다.

히브리어를 제외하면 오늘날 기독교가 중요시하는 핵심적인 헬라어, 라틴어, 영어 역본 모두를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슈뢰더는 ‘태초에’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베레쉬트(Bereshit)’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태초에’라는 의미가 아니고 ‘-의 시작에’라고 했다. 그리고 ‘-의’ 목적어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슈뢰더는 창세기를 아람어로 번역한 2,100년 전 아람어 역본은 ‘베레쉬트’를 복합단어로 보고, 접두사 ‘베’는 ‘더불어(with)’, ‘레쉬트’는 ‘최초의 지혜(first wisdom)’로 풀이했다.

즉 창세기 1장의 첫 단어 ‘태초에’는 아람어 역으로 보면 ‘최초의 지혜와 더불어’이다. 즉 정통 기독교의 ‘태초’ 해석과 첫 단추부터 전혀 달라진다. 그렇다면 아람어의 창세기 1장 번역은 “지혜와 더불어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된다.

이 ‘지혜’를 바탕으로, 슈뢰더는 디지털 세상이 온통 정보 속에 있듯, 물리학자답게 모든 미세 입자들은 단순한 미세 입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지혜와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바탕으로 창조주 하나님(여호와)의 정보가 담긴 입자(존재)라는 논리로 귀결한다.

그러면서 슈뢰더는 과학자로서 이것이 최근의 입자물리학자들의 동향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우주가 일종의 ‘메트릭스’나 ‘시뮬레이션’이나 ‘컴퓨터 코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토의는 이미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지 않은가.

(주: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으면서 옥스퍼드대 철학과 닉 보스트롬이 2003년 ‘Philosophical Quarterly’에 그 가능성을 주장한 이래,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과학기술 자문위원을 지낸 메릴랜드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게이츠(S. James Gates, JR)가 우주에는 에러를 스스로 고치는 코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펴고, 일론 머스크도 우주는 슈퍼컴퓨터 상의 게임 캐릭터일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논란이 확장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렇게 볼 때, 첫 단어부터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또 다른 역본들(헬라어, 라틴어, 영역본 등)의 해석 자체가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다.

이레니우스(130-200)와 어거스틴(354-430)과 세 가지 중심 되는 개혁파 신앙고백서(Reformed Confession of Faith)인 벨직·하이델베르크·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모두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믿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도 그의 『사도신경 해설』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롬 4:17)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토라를 신봉하는 일부 유대인들의 창세기 1장 1절 해석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 딜레마인 것이다. <계속>

60회 기독교학술원 창조론
▲조덕영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