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곳곳에서 지혜를 예찬한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지혜로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을 든다면, 당연 솔로몬일 것이다. 그는 일찍이 지혜의 가치를 알아 일천 번제(燔祭)를 드린 후 하나님이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지혜를 구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가 구하지 않은 부, 장수까지도 약속받았다(왕상 3:4-13).

실제로 그의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30)고 성경은 밝힌다. 죽은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실랑이 하는 두 여자 중 아기의 친모를 밝혀낸 그의 지혜는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의 ‘지혜 숭상’은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성경적 원리에서 연원(淵源)한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지혜로울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 지혜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사이비 철학가들이나 종교가들이 ‘도통(道通)해서 문리(文理)가 트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또는 실용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예수 믿으면 지혜가 생겨 공부든 사업이든, 뭐든지 잘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성도의 지혜는 그런 세상적 안목이나 처세술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경륜에 대한 이해력,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이해력이다.

세상적 지혜나 처세술만 두고 본다면,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눅 16:8)”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월등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은총적 지혜’와 ‘특별은총적 지혜’를 구분할 필요성이 생긴다. ‘일반은총적 지혜’는 신·불신(信不信)을 불문하고 주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닮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은혜이다.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신(잠 3:19)”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의 형상(the image of wisdom)’이 투영된 결과이다. 비록 ‘일반은총적 지혜’가 죄로 손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인간 속에 잔존한다. 인류는 그것으로 오늘 같은 과학, 문명의 눈부신 발달을 이루었다.

특히 그것이 이룬 종교, 철학, 윤리의 발달은 신적(?) 영역에까지 근접한 듯해 보인다. 그것으로 성자(聖者), 박애주의자, 철학자, 신비주의자들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비록 범상(凡常)치 않아 보이나, 기껏 자연인 안에 잔존하는 ‘일반은총’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형상(supernatural image)’인 ‘영적 지혜’는 죄로 부분적 파괴가 일어난 ‘일반적 형상(natural image)’과는 달리 완전히 파괴됐다. 이제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는 전혀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됐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 인간 지혜가 전혀 무용(無用)해졌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특별히 선지자와 율법을 가졌고 숱한 이적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던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3)”며 그들의 ‘하나님 무지’를 책망하신 것은 그들에게는 엄청난 모독이었다.

이렇게 성경 곳곳에서 타락한 ‘인간 지혜’의 무용함을 선포함에도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이 비록 죄로 하나님을 아는 ‘초자연적 형상(supernatural image)’이 파괴됐지만, 여전히 인간 안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부분적으로 잔존한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잘 길어내느냐(draws it out, 잠 20:5)에 따라, 하나님을 알게 되기도 하고 모르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 철학의 흥왕은 어쩌면 ‘인간 지혜’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이런 사람들의 무모한 시도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사도 바울이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전 1:22)”고 한 것은 철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던 헬라인들의 노력을 두고 한 말이다. 철학의 도시 아덴(Athens)의 수많은 제단들과(행 17:23) 헬라의 수많은 신화(神話)들 역시 인간 지혜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의 흔적들이다.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 종교성과 문화, 예술을 통해 하나님을 조우하려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뉴 에이지(New Age)’, ‘내면의 빛’을 통해 신을 조우하려는 ‘퀘이커 교도들(Quaker)’이나 ‘내면의 영적 씨알과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mysticists)’도 다 그런 노력의 부산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적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다. 이는 마치 창조 직후 깜깜한 흑암 가운데 있던 태초의 우주의 모습(창 1:2)과도 같다. 물론 성경에는 인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잔존하는 것처럼 말하는 곳들도 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인간) 속에 보임이라(롬 1:19-20)”,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행 16:26-27)”.

그러나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음을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롬 1:19-20)”을 의미하지, 인간 안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헛된 철학에서 떠나라”고 책망했던 것도(골 2:8), 일찍이 그것의 무용성(無用性)을 알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지혜’는 인간을 자기의 궤휼에 빠뜨려(고전 3:19) 그의 영혼에 해악을 끼치기까지 한다. 바울이 자신의 율법적 의를 비롯해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도 그것의 해악 때문이라고 했다(빌 3:4-9).

이 대목에서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관계가 있으냐”던 터툴리안(Tertulian, 155- 240)과 “이성(理性)을 인간을 파멸에 빠뜨리는 음녀”라고 했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말이 연상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무지해진 절망적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만세 전에 성자 그리스도를 당신의 계시로 준비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알려 진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이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는 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이 ‘그리스도의 계시성’은 그의 구속(救贖)에 근원한다. 죄로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화목해짐으로 하나님 계시가 열리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는 인간의 지혜를 무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평균케 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촌로(村老)나 대학자나 오직 그리스도로만 하나님 계시가 열리기 때문이다.

또한 위대한 종교가 철학자가 평생을 탐구해도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을 무식한 촌로가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알게 되니,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드린 학문적 노력과 경건을 부끄럽게 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부끄럽게 하는 이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가졌고, 스스로를 하나님을 독점한 선민(選民)으로 자처했던 유대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반면 율법도 선지자도 없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신바 됐다고 판명됐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전 1:27)”는 말씀은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이런 역설과 반전을 통해 성취됐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