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백성훈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복음의 변질은 구약과 신약을 따로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 미혹이 있을 것이라 경고도 하셨습니다. 복음의 변질을 막으려면 정확한 근거와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은 절대적인 기준이 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미혹의 근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변질시켜서 바른 진리라 주장하는 것이 미혹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인 미혹의 사례를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유대주의,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자신들 마음대로 변질시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자신들에게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선지자들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리더십 강화에 활용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부분만 가져와서 유대인들만 선택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십계명 등 율법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만 가져와서 마음도 중심도 변질된 채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만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구약시대에 특정한 사람에게 부어주신 권위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부어주시고, 성령의 시대가 열릴 것이니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한 예배자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이스라엘을 선택하였으나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들까지 모든 나라의 백성들에 구원의 은혜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도 외적 행위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예배와 중심의 온전함을 강조하여 회개를 통해 그 마음과 중심을 지키는 것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통해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약을 신약으로 정제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셨습니다.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신약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구약과 신약을 같이 보면서 구약을 보면 신약이 열리고, 신약을 보면 구약이 열리는 이 오묘하고 신비한 말씀의 맥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도 이렇게 성경을 보지 않고 구약과 신약을 따로 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의 권위를 지금 목회자에게 바로 적용하여 권위를 강화하고, 전염병과 재난으로 심판하셨던 일을 지금 시대의 아픔들에 그대로 적용하여 무슨 재난과 사고가 있을 때마다 심판을 받았다고 오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회막과 성막, 성전의 의미를 교회의 건물에 적용하며 이스라엘을 선택하였으니 지금도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구약을 신약으로 잘 정제하여 해석하지 않고 곧바로 현 시대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을 예수님도 여러 차례 경고하셨고, 바울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에 이 중 가장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회개의 교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어떤 심판이나 징계를 받았을 때만 회개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 회개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영혼은 모두 죄인입니다. 이 땅에 의인은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 10절)”.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장 32절)”.

그래서 우리 모두는 회개함으로 구원받지만, 그 이후에도 늘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사도행전 17장 30절)”.

시편 51편은 회개에 대한 구체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남편이 있었던 밧세바와 동침하여 죄를 저지릅니다.

이 과정에서 참 안타까운 것은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선왕(先王)이었던 사울과 계속 비교되어 더욱 하나님의 뜻을 붙든 왕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문화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사회에서는 가장 민감한 성적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더욱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참 감사한 것은 이 죄악을 자신 앞에서 고발한 나단 선지자의 정죄 앞에 곧바로 깊이 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제왕적 문화에서 왕이 한 여인을 취하는 것은 그리 큰 죄로 단정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율법에 어긋나는 죄임을 다윗이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깊이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회개? 구약만 보면 징계와 심판에 대한 회개로,
신약을 보면 우리 죄성에 대한 회개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평소에도 늘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편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악을 고발당했을때 기도했던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고 회개합니다.

그 회개의 내용이 너무 정직하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날마다 죄로 인하여 넘어지면 살아갑니다. 그래서 또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데, 다윗의 회개를 통해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다윗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정죄와 징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회개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다윗의 고백을 묵상해 보면, 다윗의 회개가 이 사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깊은 곳까지 다 드러내고 회개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3-5절)”.

다윗은 스스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지금의 죄과를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어떤 사건에 대한 죄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 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재판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피의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우리 영혼이 죄인인 것과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한 죄과를 모두 물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과 권력이 많을수록 죄를 인정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마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죄를 쉽게 인정해도,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죄를 덮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이 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자칫 왕으로써 권위를 내세우고 일반적인 문화과 기준을 앞세워 죄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평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늘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죄성과 죄과를 모두 회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평소에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회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이유를 하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숨길래야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절대로 속일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은 더 나아가서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원래는 안 그러는데 이번 한 번만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죄의 형벌을 탕감받으려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깊이 회개하는 사람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죄 앞에서 자신의 어떤 자랑도 타협도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신앙이었고 또한 결국에는 하나님이 용서하신 근거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절)”.

여기서 죄악을 고치는데 사용할 도구로 우슬초가 거론됩니다. 우슬초는 출애굽기 10재앙의 마지막 장자 재앙때 사용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한 가지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우슬초에 양의 피를 발라 출입문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장자 재앙이 피해 갔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나병 환자의 집을 정결하게 하거나, 장례를 집도한 사람이 부득이 시체를 만졌을 때 이를 정결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도 우슬초를 언급하며, 하나님께 자신이 죄악이 해결되어 정결하게 되기를 요청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죄와 싸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우슬초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통해 영혼에 스며든 죄를 깨닫게 되고, 기도를 통해 그 죄를 쫒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말씀과 기도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제 다윗의 기도에 정점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사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죄가 정결케 된다는 말은 참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주 구체적으로 정결케 되는 방법을 고백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죄의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롭게 의의 마음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마치 은혜로 우리 영혼이 충만해져서 죄를 잊게 되고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의의 마음을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죄를 이기기 위해 결단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당장 내 옆에 불륜을 저지른 목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회개한다 해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별로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 속에 불륜은 너무 큰 죄이고 너무 큰 상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쉽게 회개와 회복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윗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불륜의 죄를 이토록 깊게 회개하기 힘든데, 왕으로써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처럼 회개한다는 것은, 그마저 하나님께서 회개를 받으시고 용서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우리의 염려과 의문은 본문의 17절에서 드디어 답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절)”.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악의 정도를 따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해 회개하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보십니다.

정말 얼마나 깊이 통애하고 자복하며 하나님께 나아왔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가식과 연기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재난과 우리의 고난을 보며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울삼아 우리 스스로 회개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 재난이 있거나, 사업이 안 되어 실패하였거나, 돈이 없어 가난해졌거나, 몸이 아파서 병이 들면 심판받았다고 정죄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면서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정죄하지도 않았고, 제자들의 재정적 형편을 고려하여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을 두고 제자들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어떤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모든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 앞에, 우리는 정죄하는 일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재난과 아픔은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상한 심령’임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상한 심령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상한 심령이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부터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할 힘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통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일상을 맡기고 작은 죄라도 상함 심령이 되어 그분 앞에 나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팀사역의 원리>, <시편의 위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