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님은 동시대인들로부터 극과 극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어떤 이들에게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 사기꾼이요 저주받을 신성모독자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얻은 “의혹케 하는 자(요 10:24)”라는 ‘별명’에서, “자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서도 그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다양한 인식이 반영돼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호함은 어디서 왔는가? 그가 신비주의 전법을 구사하여 연막을 친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한 때문인가? 이는 그의 역설성(The nature of Paradox)에 기인한다.

◈예수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existence)

예수님이 동시대인들에게 ‘의혹케 하는 자’로 비친 것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 그것도 그냥 보통의 인간이 아닌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범죄자의 모습을 가진 그의 ‘존재적 패러독스(paradox, 逆說)’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스스로를 하나님 아들로 자처하며 기이한 능력들을 행했으면서도, 정작 그를 잡으러 온 로마 병정에겐 아무 항거도 못한 채 십자가에 달려진 그를 과연 누가 구원자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대중들의 눈엔, 그의 신묘막측한 행적들이 단지 눈속임의 쇼(show)로 비쳐졌을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에게는 그런 그의 존재적 패러독스가 오히려 그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요인이 됐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마지막 운명까지 목도 했던 로마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고 고백한 것은 그것의 확증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믿는데 걸림돌이었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고 조롱한 것은 당대의 보편적인 ‘예수 인식’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너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말이냐? 스스로의 힘으로 십자가를 벗고 내려오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존재적 패러독스는 그것을 받는 사람에 따라 그를 ‘요긴한 모퉁이돌’ 혹은 ‘버려진 돌(벧전 2:6-8, 사 8:14)‘로 삼게 했다.

다윗(행 2:25-27)을 비롯해 구약의 모든 성도들 역시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 와서 그 백성의 대속물(代贖勿)이 될 것이라는 그의 존재적 패러독스(paradox)를 보았고,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촉발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린 ‘희생제물’의 피에서 장차 흘려질 하나님 아들의 피를 보았고, 그 피가 그들의 죄를 구속하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

◈율법 패러독스

성경은 율법을 ‘생명과 축복(롬 7:10, 잠 29:18)’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죽음과 저주(롬 3:19, 갈 3:10, 13)’로 말하기도 한다. 이 ‘율법의 패러독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a stumblingblock)이 됐다.

율법이 ‘생명과 축복’이 됨은 사람이 그것의 정죄를 받아 절망한 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갈 3:24)’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율법이 ‘저주와 심판’이 됨은 그것의 오용(誤用), 곧 율법 준수로 구원을 얻으려다가 되려 자신을 율법의 정죄 아래 빠뜨리기 때문이다.

‘율법 안에서 죽으려는 자는 살고(롬 7:4-5)’, ‘율법 안에서 살려는 자는 죽는다(롬 7:9-11)’는 진리가 여기에도 소환된다.

이러한 ‘율법의 패러독스’는 필경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후자는 ‘율법 준수의 모범자’로 받게 한다.

그 결과 전자의 추종자는 ‘복음 신앙인’으로, 후자의 추종자는 ‘계몽주의 교인’으로 남게 한다.

율법과 관련된 또 하나의 ‘예수 패러독스(Jesus paradox)’가 있다. 곧 ‘율법의 마침자(롬 10:4, 마 5:17)’와 ‘율법의 폐지자(엡 2:15)’ 예수이다.

전자는 죄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예수가 대신 이뤘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믿음으로 예수의 율법적 의를 전가 받은 자들에게는 율법의 정죄가 폐지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패러독스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율법의 마침자 예수(롬 10:4)’를 구약의 ‘율법주의 구원 경륜’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믿음의 구원 경륜’을 도래시킨 분으로, ‘율법의 폐기자 예수’를 소위 ‘율법의 제3용도(Jhon Calvin)’까지 다 폐기시킨 ‘율법폐기론(Anitinomianism)’의 원조로 곡해했다.

◈능력 패러독스

‘전능자(The Mighty One)’라는 ‘여호와(the LORD, 사 1:24)’의 이름이 시사하듯, 기독교는 ‘하나님의 전능’ 위에 구축돼 있다.

실제 ‘하나님의 전능’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이다. 성경도 그것을 칭송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창 28:3, 수 22:22, 욥 37:23). 천군천사들의 찬송 대지도 ‘그의 전능하심(계 5:13, 19:1)’이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사 40:26), 죄인을 구원하신다(습 3:17). 그의 전능하심이 없었다면 ‘창조’도 ‘구원’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도 패러독스가 있다.

특별히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 그렇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역설적이게도 그의 ‘전능의 능력’으로가 아닌, ‘약함의 능력’으로 하셨다(고전 1:18, 고후 13:4 롬1:16). ‘강함에 구원이 있다’는 일반의 상식을 뒤엎는 패러독스(paradox)이다.

이러한 ‘약함의 구원’은 시대를 불문하고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랬다. 이적(miraculous signs)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무능한 예수는 ‘실족케 하는 돌(a stumblingblock)’이었다(고전 1:22-24).

그러나 기독교의 죄 사함, 구원, 치유 등 모든 구원 행위는 ‘약함의 능력’에 근거한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실 때(요 8:11),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마 9:2) 전능자의 위엄과 능력으로 한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의 원천은 장차 있게 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그랬듯,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불(假拂)하여 ‘용서와 치유’를 베풀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선언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나 이 구원(능력)의 패러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능과 실패의 상징이며,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실족의 빌미(a stumblingblock)’일 뿐이다.

이 외에도 ‘패러독스’는 널려 있다. 패러독스 없는 신앙은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난 패러독스(The paradox of suffering paradox)’이다. ‘죽음으로 영생(눅 16:22; 23:43)’에 들어가고 ‘고난을 통해 소망(롬 5:3-4)’으로 진입한다.

지금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love)’ 속에 놓여 있다. 코로나(the corona)의 음습(陰濕)한 공격 속에서 때론 우리가 혼돈과 두려움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믿기는 결국에는 그의 사랑이 이길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