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 흐르는 메시지, 생명 경시
부정적 메시지, 악, 위선, 폭력 등 크게 부각
아래를 보고 있으면, 결코 무지개 볼 수 없다

칸 영화제 기생충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언론은 계속해서 장르와 기교의 탁월성을 들어 기생충을 문화의 견고한 축으로 만들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 하는 듯 보였다.

아카데미의 높은 벽과, 그 벽에 비해 왜소했던 한국 영화의 당찬 도전을 자랑하기 위해 골리앗과 그에 대한 다윗의 승리를 이용하고, 역사적 사건, 민족의 괘거라는 말로도 부족했는지 현존하고 있는 감독 봉준호 씨 고향을 문화적 성지(?)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편승하여 영화는 수만 관객을 동원 하면서 고공 행진 중이었다.

그러나 이 열풍도 코로나19 바이러스 로 인해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어느 무엇도 생명의 가치를 앞설 수 없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영화 <기생충> 전편에 흐르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생명 경시이다. 불편한 감정이며 막연한 불안이다. 공포이며 우울이다. 불안은 죽음 지향적 감정이다. 대상이 있는 공포와는 다른 차원이다.

영화 <기생충>의 분위기에서 공포를 느끼는 관객은 필연적으로 죽음 지향적인 불안에 내몰리게 되어 있다.

내가 필연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영화 <기생충>이 가난한 자(the poor)들과 부자(the rich)들을 우리에 집어넣고 싸움질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행 길목에 위험 요소를 두어 가난한 자의 삶의 상처를 부각시킴으로써 관객의 동정을 구걸하고, 순간 반전을 기대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자유시장 경제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에서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있기 마련이라 생각한다. 그러해도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때문이다. 생명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생충의 인물들처럼 가난한 자가 폭력으로 가진 자의 것을 탈취하면 악순환이 되어, 사회는 죽음 지향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 문화는 문명의 파괴로 치닫는 길이다.

기생충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의 말처럼 인간이 상황을 질문하면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답하신다고 믿는다. 기생충에서처럼 폭력만이 해결책인지, 우리는 자신과 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일찍이 영국 극작가로 뛰어난 코미디언 영화 감독자였던 찰리 채플린(S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비극적 인생을 희극적 삶으로 바꾸는 힘이 유머다.”

그렇다. 훌륭한 코미디 작가(작품)란 상징과 메타포를 통해 통쾌한 유머를 관객의 가슴에 심어 재미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작품과 인간이 ‘교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은 ‘교감의 부재’이다. 부정적 메시지, 악, 위선, 폭력, 생명경시가 너무 크게 부각되면서, 악덕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비추어 졌기 때문이다.

교감(correspondances)이란 생명성을 토대로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침몰되지 않고 삶을 객관화함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신과의 조화를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언약의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교감을 이렇게 형상화한다.

“인간이 그 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향기와 색체와 소리가 서로 화합한다.”

그렇다. 교감이란 인간과 자연과 신과의 소통이다.

다윗과 골리앗이란 패널의 찬사에 내가 폭소한 이유도 말해야겠다. 다윗의 돌팔매가 골리앗을 이긴 사건은 무지개 언약을 믿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계약이 무지개 언약이다. 그러나 <기생충>에는 무지개가 없다.

무지개는 무한을 향해 손을 드는 삶을 상징하는데, 인물들은 대부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아래를 보고 있으면 결코 무지개를 볼 수 없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인도의 타지마할에 간 적이 있다. <계속>

송영옥 기독문학
▲송영옥 작가.
송영옥 박사(영문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