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용
대학. 중용

주희 | 김미영 역 | 홍익출판사 | 228쪽 | 12,000원

중심을 잡아야 무너지지 않는다
독서 순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은 유학 공부 방법 알려줘
중용은 공자 가르침 하늘과 연결

중심을 잡아야 넘어지지 않는다. 상점마다 잘 차려 입고 서 있는 마네킹. 보는 사람이 주눅들 정도로 비율이 좋다. 비율 좋은 마네킹이지만, 균형 감각은 꽝이다. 혼자 서있지 못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심을 못 잡으면 잘 차려 입고도 넘어진다.

마음도 중심이 중요하다. 중심을 잡아야 무너지지 않는다. 중용(中庸)이 필요하다. 성리학을 확립한 ‘주희’는 중용(中庸)을 이렇게 말한다. ‘치우치거나 기댐이 없으며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것’.

중심이 잘 잡힌 마음이다. 이 중용(中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 <중용(中庸)>이다.

유학에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이 네 권을 묶어 사서(四書)라고 한다. 이는 유학을 배우는 사람의 필독서이다.

주희는 사서(四書) 중 <중용(中庸)>을 제일 마지막에 읽을 것을 권한다. 주희가 말한 사서(四書)의 독서 순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다. <대학>을 먼저 읽고. <논어>와 <맹자>를 읽고, <중용>을 읽으라는 말이다.

<대학(大學)>이 유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라면 <논어(論語)>는 그 가르침 자체이고, <맹자(孟子)>는 그 가르침을 확장한 내용이다.

<중용(中庸)>은 공자의 가르침을 하늘과 연결한다. 군자의 삶을 단순히 사람이 따라야할 가르침을 넘어, 하늘이 만물에 부여해준 본성이라고 말한다. 철학으로써의 유학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스케일이 커졌다. 책은 얇아도 내용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읽을 때 여백이 필요하다. <대학>, <논어>, <맹자>는 읽으면 뜻이 쉽게 이해되는 반면, <중용>은 한번 생각하는 여백을 주고 읽을 때 그 의미가 다가온다.

하나님 형상으로 만드신 우리, 성(性)
하나님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 도(道)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 교(敎)

<중용>은 하늘이 만물에게 본성을 주었다고 말한다. <중용>의 첫 문장이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자신이 부여받은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敎)’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성(性)’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성(性)’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道)’가 된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이 ‘교(敎)’가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성(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도(道):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는 삶이다
교(敎):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性)
하나님 닮기 위한 노력(道)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敎)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性). 그러니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道). 성경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보며, 실천한다(敎).

<중용>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쉬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떨어질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삼가고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조심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닮기 위한 노력이 끊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주일은 하나님을 닮기 위해 살아가고, 월요일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없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라도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격이 잘 보이는 순간,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하는 선행, 진짜 신앙
아무도 모르는 골방 기도, 진짜 대화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이 다음과 같다.

莫見乎隱(막현호은)
莫顯乎微(막현호미)
故 君子 愼其獨也 (고 군자 신기독야)

“은밀한 곳보다 눈에 잘 띄는 곳이 없고, 미미한 일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에 신중하게 행동한다.”

내 인격이 언제 가장 잘 보이는가? 혼자 있을 때다. 아무도 없을 때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D. L. 무디는 “인격이란 아무도 없을 때 나의 모습”이라고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하는 선행은 진짜 신앙이다. 아무도 모르는 골방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일대일 시간이다.

청년 시절, 기도회 시간에 기도하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교회 기도회 시간 말고, 혼자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가? 새벽기도, 금요 기도회 시간 말고, 별도로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가? 그 시간이 없다면, 나의 기도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일 수 있다. 남들에게 보여 지는 종교 행위일 수 있다.’

그러면서 개인 기도시간을 별도로 만들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신앙생활이 있어야 그 신앙이 진짜다.

중용,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
세리와 죄인, 순종 부족해 고개 숙여
바리새인들, 순종 넘쳐 말씀 벗어나

<중용>에서는 도를 이루는 모습을 ‘중용’이라고 말한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를 밝게 알지 못함을 나는 알겠다. 현명한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맛을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구해줘
▲주자학의 시조 주희(왼쪽)와 명 제국 황제 만력제.
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세리와 죄인들은 순종이 부족했다. 그래서 늘 고개 숙이며, 부끄럽게 살았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순종이 넘쳤다. 말씀을 넘어 전통까지 지키며 살았다. 넘쳤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났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순종이 부족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로 나왔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 앞으로 왔다.

반면 순종이 넘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고, 제자들을 정죄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순종이 부족하면 내가 아프지만,
순종이 넘치면 주변이 아프게 돼
모자라면 고생, 넘치면 고문한다

순종이 부족하면 내가 아프지만 순종이 넘치면 주변이 아프다. 모자라면 고생하고 넘치면 고문한다. 주변을 아프게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벌써 한쪽에서는 ‘의로움’이 넘친다. “‘저들’을 향한 하나님 심판이고,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다”. ‘의로움’이 넘쳤다.

9·11테러 이후 존 맥아더 목사님이 하신 설교가 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보다 부족하면 차라리 회개하지만, 더 넘치게 점수를 주면 남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너무 부족하다 자책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 너무 넘쳐서 정죄해서도 안 된다. 남을 정죄할 만큼 의로움이 넘치는 사람은 없다. 이 마음 균형 잡기가 어렵다.

공자도 중용이 어렵다고 말한다. 공자는 말한다. “천하 국가를 잘 다스릴 수도 있고, 벼슬을 사양할 수도 있으며, 서슬 퍼런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어도 중용은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성실이다.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성자 물지종시 불성 무물)
是故 君子 誠之爲貴 (시고 군자 성지위귀)

중용 이루는 삶 위해 성실하게 노력을
지극히 성실하게 되면 그침이 없게 돼
사랑도 계속 해 나갈 때, 상대방 변해

“성실함은 사물의 처음이지 끝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어떠한 사물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실함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중용을 이루는 삶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하게 되면 그침이 없게 된다. 그침이 없게 되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면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으면 넓고 두터워지고,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처음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렵다. 그동안 미워하던 사람에게 한 마디 말을 건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극히 성실한 마음으로 계속 도전한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네 번 여덟 번이 된다.

그러면 어느새 사랑이 익숙해진다. ‘그침이 없게 된다.’ 그렇게 사랑을 계속 해 나갈 때, 상대방이 변한다. ‘효과가 있다.’ 그러면 그동안 눈물이, 그동안 노력이 헛수고가 아님을 알게 된다. 더 열심히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한 사람만 사랑하던 내가 또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넓고 두터워진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사랑의 사람임을 알게 된다. ‘높고 밝아진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오전에 실패해도 오후에 다시 일어서는 삶
성실히 순종할 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매 순간 하나님 닮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

말씀대로 사는 삶은 한 번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연약함은 한 번 순종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나의 완악함은 한 번 회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실이다. 오늘 넘어져도 내일 다시 도전하고, 오전에 실패해도 오후에 다시 일어서는 삶. 성실히 순종할 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중용(中庸)>은 유학의 가르침을 우주적 관점으로 확장시킨다. 하늘이 내려 준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을 따르는 도를 이야기한다. 그 도를 끊임없이 이루어가는 삶이 군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성도의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도는 매 순간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을 닮는 삶을 위해 달려야 한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성도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로 온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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