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도올 김용옥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도올의 ‘종교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강의에 있어 흥미로운 사실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종교 일반에 대한 내용이 아니란 것이다.

그의 강의의 모든 타깃은 유일신 신학 사상 중 특히 기독교의 근본 진리인 삼위일체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내지 전복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앞으로 수회에 걸쳐 그의 강의 내용 전반에 흐르는 비성서적·반성서적 이슈를 다뤄보고자 한다.

첫 이슈는 그가 야훼를 개인적 관계의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신으로 소개하면서, 민족적 투쟁 전략 신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은 주장은 마치 야훼가 아담과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귀하고 보배로운 개체적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의미인 전 인류적 시조만을 창조했다고 우기는 것 같은 자체적 모순성을 안고 있다.

아담의 원죄가 전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면에 있어 아담이 전 인류의 대표성을 지닌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 사실이 아담 한 사람의 개체적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명확하다.

실제로 태초 에덴의 환경은 아담 한 개인의 올바른 선택으로 인해 전 인류적 재앙을 모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개체적·인격적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창조하셨고 아담과 소통하셨으며, 아담과의 관계를 통해 아담의 가정을 만드셨다. 그 후 하나님은 각 개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으로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 등 각 개인을 부르셔서 언약 관계를 맺고, 족장 시대와 사사 시대를 거쳐 마침내 이스라엘 왕정 국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구약 시대 내내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각각의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셨고, 그 언약의 말씀은 주님의 초림으로 성취됐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와 같이 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으로, 종국적으로 인류 전체에 대한 언약으로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성취되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아벨 한 사람이 흘린 무고한 피의 소리를 들으셨고, 한 사람의 의인인 노아를 부르셔서 온 지면에 사람을 쓸어버릴 계획을 거두셨으며, 아브라함 한 사람을 생각하시사 롯의 가족을 생각하셨고, 또 그를 통해 영원한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눈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의인 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에 대해 외부적으로 누적된 가시적 전통만이 전부인 양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신앙 사회의 내면적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근본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턱없이 부족한 소치이다.

변증법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나 에밀 브루너, 루돌프 볼트만 등은 계시를 하나님에 관한 정보·교리 전달이 아닌, 인간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만남이라는 관계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신학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과연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인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므로 복음주의적 관점에는 성경에 계시된 정보적인 하나님과 개인에게 주도적으로 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변증법적 신학은 모순된 잠재적 이슈를 안고 있지만, 도올 같은 경우는 숫제 그 어느 한 편에 대한 이해마저도 결여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신앙 체험의 본질은 도올이 생각하는 집단적 전승 이전에, 적어도 부름받은 피조물인 한 개인과 하나님 자신과의 존재적 조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를 개인적 관계의 신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기독교, 아니 나아가 종교 일반의 본질에 대한 기본 이해마저도 없음을 드러내는 참담한 어불성설인 것이다.

두 번째 도올의 문제는 그가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를 완벽한 무신론자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이란 말을 제일 혐오했다고 주장하는 등, 지극히 비사실적이고 모략적이고 편벽된 사적인 견해를 객관적 사실인 양 태연히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이란 표현 외에도 아버지란 표현을 즐겨 하신 것은 인격신적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신자가 하나님(주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의미를 연장적이고 확장적이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가르침으로써 보완적이고 추가적으로 설명하셨지, 율법에 모순적이지 않았다. 이렇듯 성숙한 영성의 가르침을 베푸신 예수님을 무신론자로 간주하는 것은 참으로 넌센스 중 넌센스이다.

세 번째 도올의 문제는 사도 바울의 다메섹(다마스커스) 회심 사건을 불교의 ‘대각(大覺)’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제에서 도올은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Das Heilige)>에 나오는 ‘타자(otherness)’에 대한 설명으로 장황하게 읽어 내려간다.

그 후 자신은 종교적 체험의 대상화가 불가능하다고, 즉 경배의 대상인 신을 인정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고선 돌연 서양신학에 자리잡은 유일신 개념을 힐난하며 못내 불만조로 투덜거린다.

이처럼 자신의 신(神) 개념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자신의 상태를 아는 그가 구태여 기독교를 해석하려 드는 것은, 설사 학구적 호기심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필자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전에 어떤 교인들이 사찰 내에서 ‘땅밟기 기도’를 했다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올과 같은 경우는 성막뜰뿐 아니라 지성소 안을 천방지축으로 마구 밟고 다니는 경우와 같지 않은가?

요컨대 도올은 본인이 장황하게 읽어 내려간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거룩함의 본질이 언어적·개념적 정의를 넘어서는 차원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주님의 존재를 체험적으로 느끼는(numinous) 것이 신비한 경외감과 초자연적 능력에 압도되는 불가해적인 성질의 것임을 알 턱이 없다.

도올은 엉뚱하게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임재를, 명상을 통한 불교적 각성이나 심지어 마약이나 출산, 성교 등과 관련된 강렬한 심리적 느낌, 즉 일반적 절정감(peak experience)에 빗대는 등 억지 설명마저 늘어놓고 있다.

실로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토록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모르는 그가 중세적 신앙에서 현대적 신앙으로의 변천을 운운하며, 기독교의 미래를 쉽사리 진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독교가 과거엔 민족이나 국가적인 집단적 전승에 의해 미신적으로 성행했지만, 현대에 와선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개인적 선택으로 상품화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머지않아 곧 지구상에서 기독교가 사라질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미엔 선심 쓰듯, 한국 기독교계에 친절한 조언성 주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교회가 멸망치 않으려면 사회적 이슈를 선취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진실과 개인적 조우(personal encounter)에 의한 크리스천들의 믿음 안의 진실을 예리하게 대조한 에밀브루너의 설명이, 그토록 속속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론으로 도배된 도올 그에게 과연 일말이라도 이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박현숙
▲박현숙 목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