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On Fire Revelation Clouds Light Sunbeam 종말 천년왕국 석양 불 망조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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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후서 3장 8-13절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다’라고 말한다. 삶이 어렵다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고난은 축복이다’고 말한다. 결국 해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고해라고 정의해 문제를 풀러 가려는 불교와, 인생을 축복이라고 정의해 인생을 정의하는 기독교는 출발이 다르다. 아무튼 인생은 그리 만만치 않다.

등산은 많이 힘들다

인생은 만만치 않다. 많이 어렵다. 인생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 중 한 가지가 등산이다. 저는 등산을 아주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제게 ‘바다를 좋아하냐? 산을 좋아하냐?’ 라고 물으면 늘 바다라고 한다. 산을 오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바다는 길만 건너면 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

등산이 힘들었던 경험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동료들과 지리산을 등산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리산 등산의 어려움을 알았기에, 저는 등산을 아예 포기했다.

다음으로 아들이 어릴 적 설악산 울산바위를 등산했다. 그 때 아들의 재촉과 도움으로 겨우 울산바위를 올랐다. 그 때 감격은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았다. 그 때가 제가 500미터 이상 높은 산의 마지막 등산이었다. 그 뒤로 산은 오로지 케이블카로만 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높은 산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다. 이런 높은 산은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에베레스트 산의 반밖에 되지 않는 산을 오른 사람이 있다. 그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서든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경 해석학 교수인 벤자민 L. 머클(Benjamin L. Merkle)과 2008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포레스트에 위치한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eminar 교수인 로버트 L. 플러머 (Plummer, Robert L.)와 공저한 《헬라어 성경 읽기 가이드》의 벤자민 L. 머클 교수다.

그는 4,095m의 말레이시아 카나발루산을 오른 경험할 때, 친구가 그 산을 등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받은 경험을 《헬라어 성경 읽기 가이드》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그 여정은 7,313피트(2,229미터)의 높이에다, 왕복 13.4마일(21.6킬로미터)의 거리를 꼬박 이틀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다. 첫째 날에는 라반 라타(3,270 미터)라는 휴식 장소까지 5-7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을 해야 한다.

예약한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쉼을 제공하는 침대를 확보할 수 있지만, 그날 밤 내내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이드들은 여행자들이 해가 뜨기 전(새벽 5시 30분 경)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새벽 2시 30분에 깨운다. 여행자들은 지쳐 있는 상태이고, 특히 고산병 때문에 그들에게 마지막 3시간의 하이킹은 가장 힘들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등산이 쉽다. 반면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등산이 고통 중에 고통이다. 저는 글쓰기가 쉽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글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차라리 등산하겠다고 한다.

빈부 격차는 나라도 어찌 못한다

나라도 어려운 것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빈부격차다. 최근 우리나라 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오스카상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다. 전 세계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이런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우리나라도 불평등은 심각하다.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인 것은 우리나라가 공정한 경쟁이 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들 중 상속이나 증여로 부자가 된 비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비율이 중국은 2%다. 일본은 18.5%, 미국은 28.9%다. 하지만 한국은 74.1%다. 출발 자체가 불평등이다.

우리나라는 부동산으로 얻는 불로소득이 300조가 넘는 불평등한 나라다. 돈이 있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나라의 구조다. 돈이 없으면 돈을 하나도 벌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구조다.

종말 사상으로 살아야 한다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는가?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종말 사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 사상으로 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상은 베드로가 살 당시도 다르지 않았다. 그 때도 종말 사상으로 살지 않았다. 종말 사상으로 살지 않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종말 사상을 갖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시간이 한없이 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8절)”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 관념을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볼 시간 관념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인간은 하루가 길다. 1년은 엄청 길다. 10년은 아득하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인간이 긴 시간이 하나님께는 한 순간일 수 있다고 바야 한다. 그럴 때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자신의 시대가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전 세계가 난리다. 중국 위안에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때문이다. 이 병은 전염병이다. 이 병에 감염되면 치명적이다.

우리는 나는 예외하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종말사상이 아니라 예외사상으로 살아간다. 이 병으로 중국 우한 도시 인근과 중국은 종말사상이 팽배하다.

미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도 비행기를 세 차례 보내 교민들을 귀국 시켰다. 일본의 요코하마 크루즈에 타고 있던 교민들은 대통령 전용기를 동원해 귀국시켰다. 병에 걸리면 생명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치명적이기에 감염이 예상되면 2주 이상 격리돼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

종말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마 25:1)고 하신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신랑을 맞으러 갔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종말사상을 갖고 살지 않았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게 요구한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러자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고이 우리도 부족하니 파는 사람에게 가서 구입하라고 이야기 한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하나다. “깨어 있으라(13절).”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말 사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이 오실 때 준비할 수 없다.

종말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하지만 종말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깨어 있지 못하다. 우리가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기 때문이다.”
깨어 있지 않으면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 없다. 깨어 있지 않아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종말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간절함으로 준비해야 한다

준비할 때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준비하는 마음 자세는 간절해야 한다. 준비가 간절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준비할 수 없다.

철저하게 준비하려면 영적으로 예민해야 한다. 영적으로 예민할 때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말 사상은 하나님께 초 집중할 때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나19’에 초집중하고 있다. 초집중하니 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예방까지 한다. 우리나라가 초집중할 대상이 ‘코로나19’다. 사람들은 돈을 버는 데 초 집중한다. 그리스도인은 초집중할 대상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종말에는 초집중할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 초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초집중해야 종말을 준비할 수 있다.

‘코로나19’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지금 사람들은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다. 심지어 예배드리는 곳도 가기를 꺼려한다. ‘코로나19’ 예방에 초집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초집중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자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개리 비숍(Gary John Bishop)은 그의 책 《시작의 기술》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자주 하는 생각이 삶을 바꾼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된다. 매일 생각하면 그런 사람으로 살게 된다. 어떤 생각이든 자주 하는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삶이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7가지의 ‘시작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첫째, 나는 의지가 있어. 둘째, 나는 이기에 되어 있어, 셋째, 나는 할 수 있어. 넷째, 나는 불확실성을 환영해. 다섯째,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규정해. 여섯째, 나는 부단한 사람이야. 일곱째,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 등이다.

시작의 기술이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기술이다. 처음도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다. 마지막에 따라 종말이 되기도 하고 멸망이 되기도 한다.

‘종말’과 ‘멸망’은 다르다. 종말의 멸망이 아니다. 멸망 직전이다. 멸망은 한 시기와 시대, 나라 등의 끝이다. 고려의 멸망, 조선의 멸망 등이다. 그 다음이 조선이 시작되고 한국이 시작된다. 멸망은 곧이어 다른 것의 시작을 가져온다. 하지만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이 없다.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다. 인류의 종말이 오면 모든 것은 끝이난다.

종말의 반대말이 창조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세상 종말의 반대말이다.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공을 들인다. 하지만 종말에는 공을 들이지 않는다. 시작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린다. 하지만 종말에는 정신을 흐릿해진다.

이런 말이 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올 때는 준비를 한다. 출산 준비를 적어도 일 년은 한다. 갈 때는 준비가 없다. 죽음은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저는 어머니가 조금 더 사실 줄 알았다. 하지만 제 생각보다 조금 빨리 하나님께 가셨다. 죽음은 한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보다 더 많이 준비할 것이 하나님 나라에 갈 때다.

미국 농구팀 LA 레이커스의 간판인 코비 브라이언트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오전 5시면 몸을 풀던 성실한 사람이다. 농구 팬들은 그가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의 등번호는 24번이다. 그가 등번호를 24번으로 한 이유가 있다. 그의 등번호 ‘24’는 소중한 하루 24시간을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사고 당일에도 오전 7시 미사를 봤다.

그는 NBA 5회 우승, 올스타 18회, 올림픽 금메달 2개, 선수 시절 수입만 약 8,000억 원….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결과물이다. 이젠 그는 불멸의 전설이 됐다.

그러나 사망한 당일 날 죽을 준비가 없었다. 농구 코트에서 펄펄 날 준비만 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하나님께 천 년, 만 년 쓰임 받을 준비만 하고 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종말을 준비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 전부다.

우리는 종말 준비를 해야 한다. 종말 준비하되 간절함으로 해야 한다. 종말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심하다 개인적인 종말을 당한다. 미련한 열 처녀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방심은 금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방심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방심을 지나 ‘무시’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을 엄청나게 무시한다. 종말은 무시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준비하되 절박함으로 준비해야 한다.

삶에서의 답도 절박함이다. 종말 준비도 절박함으로 해야 한다. 절박함으로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한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한다

셀레스트 헤들리(Celeste Headlee)는 그녀의 책 《말센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이 통하기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라.”

우리가 말만이 아니라 마음이 통해야 진정한 대화가 이뤄진다. 언제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분에게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라고 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 종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종말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면 종말을 준비한다, 하나님께서 종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성경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책이다. 이 책들은 종말을 엄청 강조한다. 요즘 책 중에 인기 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작년 2019년에 요한계시록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그 말은 삶이 힘들다는 것이다.

아파트 값은 고공행진하고 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 소상공인은 폐업이 다반사를 이루고 있다. 교회는 성장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 이런 환경이면 종말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 마음 속에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는 급박함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상에 종말이 오면 절대자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심판에 대한 질문에 대한 긍정적 답변 비율은 최근 25%로 30년 전(35%)에 비해 10% 포인트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종말 신앙이 실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신대학교 박영돈 교수는 그의 책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서 한국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으킴을 받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 목표와 비전, 가치, 사역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이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우리가 종말 신앙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종말 신앙이 약화되는 이유를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종교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 생활수준이나 소득 정도가 높아지면 종교적 신념은 약화되는 경향을 띄게 된다”고 한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공포가 드리운 불안한 시대였다. 거듭되는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루터 또한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믿었으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즉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된 데는 종말적인 신앙이 한 몫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도 종말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더욱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한 마디로 ‘고정관념’이다. 즉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다.

그리스도인은 고정관념 중 하나가 말은 ‘예수님께서 오신다.’다. 하지만 의식은 ‘예수님께서 늦게 오셔라!’다. 즉 종말 신앙이 옅으니 종말 신앙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질 고정 관념은 하나다. ‘예수님이 반드시 오신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심판주로 오시니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되 절박함으로 살아가려고 해야 한다.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종말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살되 절박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절박함으로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절박하지 않은 태도로 신랑 예수님을 맞이했다. 그러니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예수님을 맞이한 것이다.

11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11절과 12절을 같이 읽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절박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자세가 종말의 때에 종말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