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부르심

에드먼드 클라우니 | 이정규·황영광 역 | 복있는사람 | 168쪽 | 10,000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팀 켈러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초대 총장, 그리고 실천신학 교수로 일했으며, 한국에도 <베드로전서 강해(IVP, 2008)>, <설교와 성경 신학(크리스챤출판사, 2003)>, <예수님은 십계명을 어떻게 해석하셨는가?(크리스챤출판사, 2008)> 등 주로 주석이나 조직신학 관련 서적이 소개돼 있다.

그래서 클라우니를 신학자로만 생각했다면, 이 책, <부르심>은 그가 1942년 정통장로교회 목사로 5년간 일한 목사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주로 설교 목사로 활동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클라우니의 설명은 다분히 목회적이며, 다양한 종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역으로의 부르심(Called to the Ministry, 원서 제목)’이라는 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적 소명에 관하여, 오늘날 기독교가 오해하거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이 책을 통해 강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부르심’ 없이도, 신학교 졸업장을 들고 교단의 정식 임명만 받으면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한지 모른다. 심지어 주를 알지 못하는 이도(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 주의 일꾼이 될 수 있다니,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을 배제한 사역으로의 부르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참회의 간구를 하며 성도들을 품기 전에는, 감히 당신의 손을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백성을 축복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역으로의 부르심 이전에 진정 당신이 해결받아야 할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입니다(21쪽).”

사역은 단지 생계수단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찾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 사역자로 일해서는 안 된다.

구약 시대 거짓 예언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서운 벌을 내리신 것처럼, 신약 시대 야고보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 것처럼,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관하여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으로 삼으신다.

조심스럽지만, 또 한 가지 클라우니가 말하는 ‘부르심’이 주는 교훈은 교회에 속하지 않는 부르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서로 돌보는 것을 떠나서 당신의 은사를 성숙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부름받은 생동하는 유기체를 떠나서 자신의 부르심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참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72쪽).”

이를 통해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딤전 4:14)”고 권면했다. 그러면서 에베소 교회 안에서 계속 그 은사를 통해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사역자는 개인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교회를 섬기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치유 사역, 방언 사역, 기도 사역, 부흥 사역, 찬양 사역, 구제 사역 등 오만가지 이름으로 ‘사역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아무런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활동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부르심 사명 목표 성취 수평선 길 도로 방법 오직 하나 겨울
▲ⓒ픽사베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없다. 교회의 온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난다(골 2:19).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 성도와 연합하지 아니하고 사역하는 사람은, 클라우니가 지적한 것처럼 참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클라우니가 설명하는 목사의 부르심은 참으로 독특하고 신선하다. 그는 목사, 전도자(전도사가 아니다), 교사, 집사를 구분하면서도, 오늘날 목사적 전도자, 전도자적 목사, 그리고 집사의 기능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을 불분명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억지로 구분하여 한 가지만 고집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가령 ‘나는 목사니까 설교와 가르침만 신경쓰지, 성도의 실질적 필요나 행정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어’라는 식의 생각을 고쳐먹게 한다.

반대로 교회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목사들에게, 클라우니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 책상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111쪽)”라고 권면한다.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기 삶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결국 목사로서 특별히 부르셨다는 말의 의미는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에 충성하라는 것과,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조화롭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클라우니는 목사의 ‘부르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그의 권위가 빌려온 권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한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순종하고 섬기는 부르심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의 목사가 성직자로 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곧 시작이며 끝”이란 말은, “모든 성직자가 가질 수 있는 교만을 잘라”내고,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에 반하는 모든 대적을 잘라낸다(97-98쪽)”.

오늘날 아직까지 남아 기세를 부리는 권위주의와 그에 반항하여 일어난 탈권위주의 모두에게 일침을 놓는 말이다.

그 어떤 사역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자기 권위처럼 주장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어떤 성도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그 권위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신 신실한 주의 일꾼의 권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인정 없이, 교회 정치가 세속적인 정치와 다를 바 없어지는 행태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마지막으로 클라우니는 ‘부르심’을 확인하는 여러 단계를 소개하는데, 이는 학교를 졸업하거나 교단의 인정을 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물론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는 신학교에 들어가 소명을 확인하도록 조언하고 교회 성도의 검증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따로 있다. 현재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신 자리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것이다.

“믿음의 헌신 없이, 그리고 순종하는 삶 없이는 그 누구도 자신이 사역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내일 그리스도를 어떻게 섬길지 알기 위해서 당신은 오늘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에 불을 붙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명백해질 것입니다(153쪽)”.

모든 그리스도인은 클라우니가 말한 ‘부르심’을 받았다.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리고 교회와 관계없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부르심’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고,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지 충성을 다해 그리스도와 그가 피로 사신 몸을 위해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으로 일하는 것, 그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의 합당한 자세이다.

이것을 일깨워주는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부르심>이, 그 부제처럼 ‘인생의 참된 사명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안내해주길 기도한다.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